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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게재 일자 : 2011년 10월 07일(金)
아시아 ‘知의 판도’ 바꾼 훈민정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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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의 탄생 / 노마 히데키 지음, 김인아·김기연·박수진 옮김 / 돌베개

“‘정음’은 ‘문자 자신이 문자 자신을 말하는 책’으로서 세계사 속에 등장하였다. ‘훈민정음’이라는 책은 이런 점에서 그 존재의 양상 자체가 희유(稀有)하다. 그 존재 방식 자체가 세계 문자사상 비할 데 없는 광망(光芒)을 발하는 것이다.”

이 문장만 읽어 보면 한글에 대한 민족주의적 우월감에 빠져 있는 한국인의 글인듯 싶다. 그러나 이 글은 일본인이 쓴 것이다. 한글의 ‘광망’을 증거하는 내용을 읽어 보면 단순한 예찬이 아니라 언어학의 보편적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유사 이래 문자라는 것은, 돌에 새겨져 혹은 뼈나 갑각(甲殼)에 새겨져 역사 속에 나타나는 존재였다. 그에 비해 ‘훈민정음’은 목판에 새겨지고, 종이에 인쇄되고, 제본된 책의 형태로 세계사에 등장하였다. 그 책에는 무엇이 쓰여 있었는가? ‘정음’이 누구를 위하여 어떠한 목적으로 만들어졌고, ‘정음’은 이러저러한 시스템이다, ‘정음’은 이와 같이 쓴다, 바라건대 ‘정음’을 보는 자여, 스승 없이도 스스로 깨칠 수 있기를-이라는 내용이 쓰여 있었다. 나아가 ‘훈민정음’ 언해본은, ‘정음’은 이렇게 쓰는 것이라고 ‘정음’ 자신이 어떠한 문자이며 자신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스스로 알려주고 있다.”

이 글을 담고 있는 책 ‘한글의 탄생’은 2010년 일본에서 출간됐다. 저자는 일본인 한국어학자인 노마 히데키. 현재 아키타 국제교양대학 객원교수로 있는 그는 당초 현대일본미술전에 입상할 정도의 실력을 갖춘 미술가였다. 우연히 접한 한글의 매력에 빠져 독학으로 공부하다가 1983년 30세의 나이에 도쿄외국어대 조선어학과에 입학해 한국어학자의 길을 걷게 됐다.

그의 책 ‘한글의 탄생’은 일본어권 독자를 대상으로 한 인문교양서다. 이 책은 출간 이후 일본 서점에서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를 정도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마이니치신문사가 주관하는 ‘아시아태평양상’을 수상함으로써 인문학 서적으로서의 작품성을 인정받기도 했다. 한국어판 번역자인 김진아씨는 “일본에서의 한류 붐은 대중문화적 차원이었다”며 “한글에 관한 인문학 책이 일본 대중과 학계의 인정을 받은 것은 문화적 차원에서나 지적(知的)인 차원에서나 한국과 한국어의 위상을 바꿔놓은 대사건이었다”고 말했다.

저자는 이번에 나온 한국어판 서문에서 “한국 독자를 위해서 약간의 가필을 했으나, 원저가 일본어권 독자들에게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를 한국어권 독자가 알 수 있도록 가필은 최소한에 그쳤다”고 설명했다. 그는 책에서 ‘언어란 무엇이고 문자란 무엇인가?’라는 보편적인 질문을 통해 한글의 본질을 통찰한다. 한글 이전의 문자생활, 한글의 창제 과정, 한글이 한반도에서 ‘지(知)’의 판도를 뒤흔들어 놓은 과정, 한글의 미적 형태의 발전에 이르기까지 한글을 입체적으로 다뤘다.

저자에 따르면 한글 창제는 새로운 문자 체계의 발명을 넘어선 지적, 문화적 혁명이다. 소리가 문자가 되는 시스템을 갖췄다는 것은 세계 문자사의 기적이라는 것이다.

그는 이 책에서 한글 창제를 둘러싼 세종대왕과 최만리의 대립이 정치적 차원이 아니라 문자의 원리와 영향을 둘러싼 지적(知的) 투쟁이었다고 주장한다. 저자에 따르면 최만리가 상소문을 통해 “용음합자(用音合字)가 옛것을 거스르는 일”이라고 말한 것은 한글의 원리를 정확히 간파한 것이다. 용음합자, 즉 소리를 나타내는 자모를 조립해 문자를 만드는 방법은 지구상의 어디에도 없었기 때문이다. 최만리파는 지식인으로서 존재의 근원이었던 한자(漢字) 대신 ‘정음’을 만드는 것을 지(知)의 붕괴로 봤다. 지식인들이 한자를 공부하지 않고 쉬운 정음만 익히려 한다면 성현의 가르침을 멀리하게 되고 결국 세상의 이치에 어두워질 수 있다고 우려한 것이다. 이런 걱정은 현대 한국인의 문자 생활을 들여다볼 때 선견지명의 측면이 있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최만리파와의 지적 투쟁에서 승리한 세종과 집현전 학자들은 ‘정음’을 활용해 글을 쓰는 용례를 위해 용비어천가 등을 짓고 책으로 펴냈다. 저자는 그 점에 특별히 주목한다. ‘정음’을 활용한 글과 책을 세상에 내보임으로써 한글을 진정으로 완성하고 ‘지의 혁명’을 이뤘다는 것이다.

저자는 한글의 원리를 드러내기 위해 일본어, 중국어 등에 관한 이야기를 다양하게 펼친다. 이 책을 통해 한글뿐만 아니라 다른 언어의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다는 것이 큰 매력 중의 하나다.

대중을 상대로 한 책이어서인지 여느 인문학서와 달리 아주 재미있게 읽히는 것도 장점이다. 번역자는 “저자의 문체가 독특하고 품위가 있다”고 했다. 한국어판에서도 고졸한 문체의 멋과 더불어 곳곳에서 저자의 유머와 위트를 만날 수 있다.

한글의 위대한 원리를 일본 학자의 입으로 듣는 것은, 즐거우면서도 왠지 민망하다. 한글에 대해 우리 한국인들은 과연 얼마나 알고 있을까.

장재선기자 jeijei@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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