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 아닌 어깨 위 머리에서 ‘나’를 찾아라

무한공간의 왕국 / 레이먼드 탤리스 지음, 이은주 옮김 / 동녘사이언스

언제부턴가 수많은 뇌과학 서적들이 쏟아져 나온 덕일까. ‘전두엽’이니 ‘세로토닌’이니 하는 뇌과학 전문 용어가 이젠 일반인에게도 낯설지 않다.

영국의 작가 겸 철학자인 저자가 쓴 이 책 ‘무한 공간의 왕국(원제 ‘The Kingdom of infinite space’)’도 ‘머리, 인간을 이해하는 열쇠’라는 부제만 보면 뇌과학 서적 중 하나처럼 보이기 십상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작가가 말하는 ‘머리’는 눈, 코, 입, 귀, 머리카락 등을 모두 포함하는, 어깨 위 신체기관 전체다. 저자는 머리말에서 “머리를 다루는 이 책은 뇌에 대해서는 거의 논의하지 않는다”며 “머리가 주제이면서 뇌가 주연을 맡지 않은 책은 왕자가 단역에 불과한 햄릿과 같다고 느끼는 독자도 있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머리 하면 뇌를 연상하는데, 저자는 왜 뇌가 빠진 ‘머리’만을 다뤘을까. 저자는 뇌를 다룬 책이 너무 많기도 하지만 보다 중요한 이유는 ‘뇌’가 터무니없이 과장돼 있기 때문이라고 강조한다. 저자는 “뇌와 의식, 뇌와 정신, 뇌와 자기, 뇌와 나에 관한 무수히 많은 책이 출판되고, 읽히고, 할인 판매되고 있는 이유는 의식, 정신, 자기, 나에 관한 설명을 뇌에서 찾을 수 있다는 근거 없는 통념이 세상에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 얼굴 붉히기의 역사, 입맞춤의 속성에 대해 말하며 웃음이 실제로 전염된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또 머리가 내뿜는 온갖 분비물들도 이 책이 고찰하는 대상이다. 타액, 눈물처럼 유동적인 것부터 귀지와 같이 좀 더 천천히 형성되는 것, 빙하처럼 더디게 자라는 머리카락과 치아까지 다양한 종류의 분비물들을 살핀다. 아울러 언어적, 준언어적(긍정의 의미의 고개 끄덕임), 비언어적(미소 등) 신호 등 머리에서 일어나는 온갖 작용들을 문학적·철학적으로 살펴보고 있다.

이처럼 머리와 머리의 분비물을 살피는 것이 무슨 대단한 의미가 있을까. 저자는 이에 대해 “우리와 우리 머리의 관계를 곰곰이 생각해 보는 것은 우리와 우리 자신의 관계, 즉 자기 자신으로 존재한다는 것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아리스토텔레스부터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지은 밀란 쿤데라까지 고대 철학과 현대 문학을 아우르며 그 속에서 머리라는 ‘왕국’이 품고 있는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풀어낸다. 가령 ‘땀’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영국 작가 앤서니 버지스의 소설 ‘긴 하루가 저물다’ 속 땀 흘리는 장면이나 생리학자 클로드 베르나르의 이론, 땀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 ‘sweat’에 대한 사학자 로이 포터의 견해, 영화 ‘줄리어스 시저’ 속 땀 흘리는 장면에 대한 롤랑 바르트의 평론까지를 두루 언급하는 식이다. ‘나’를 찾으려는 노력은 어려운 철학용어나 쭈글쭈글한 뇌가 아니라 거울 속 ‘나’, 즉 내 머리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은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뇌 빠진 머리’를 다시금 살피게 한다.

김도연기자 kdychi@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