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서 무릎꿇린 황희의 힘… 조선 사대부 ‘文·史·哲 통치’

선비평전 / 이성무 지음 / 글항아리

조선 세종조 김종서가 6진을 개척하고 갓 병조판서가 됐을 때였다. 하루는 영의정인 황희 앞에서 김종서가 교의(交椅)에 삐딱하게 앉아 있었다. 이에 황희는 하인에게 “병조판서가 앉은 교의의 한쪽 다리가 짧은 모양이니 얼른 나무토막을 가져다 괴어 드려라”고 했다. 김종서가 깜짝 놀라 흙바닥에 내려와 사죄했다. 김종서는 “여진족을 정벌할 때는 적장이 쏜 화살이 책상에 꽂혀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는데, 황 정승에게 혼이 날 때는 등에 식은땀이 난다”고 했다.

조선조 선비들의 정신과 행태를 담은 책 ‘선비평전’에 소개돼 있는 글이다. 국사편찬위원장을 역임한 저자는 이 책에서 조선 500년간 선비라는 존재의 의미를 종합적으로 읽어내고 있다. 앞서 인용한 사례는 문치(文治)주의의 조선을 잘 보여주고 있다. 군인들이 칼로 세운 조선은 건국 이후엔 선비들이 붓으로 다스린 나라였다. 붓 빠는 사대부들이 어떻게 칼 든 군인을 누를 수 있었을까. 이들이 통치기술을 갖춘 지식인들이었기 때문이다.

저자에 따르면 문치주의는 이미 중국 고대부터 발달해 왔고 한국은 삼국시대부터 이를 배워 왔다. 무치(武治)주의는 봉건제를 선호했지만 문치주의는 군현제를 통한 중앙집권제를 선호했다. 사대부는 무력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심성 수양을 통해 사회의 안정을 이루고 사회를 통합하려 했다. 문명화된 삶을 위해 문학을, 사례를 중시해 사학을, 도덕적 수양을 고양시키기 위해 철학을 중시했다.

조선에서는 이러한 능력을 두루 갖춘 사대부들이 아니면 행세할 수 없었다. 무과보다 문과의 격이 높았고, 무산계(武散階)에는 2품 이상의 관계(官階)가 없었으며, 군사령관도 문신이 차지했다. 전술보다 전략이 중요하다는 명분에서였다. 따라서 군인들은 선비들의 수하에서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이 문약(文弱)에 빠진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조선은 또한 군약신강(君弱臣强)의 나라였다. 왕권이 강하면 환관의 발호가 빈번하지만 조선의 경우 환관은 사대부 앞에서 힘을 쓰지 못했다. 직종도 다르고, 금령도 많았으며, 처벌도 심했던 것이다.

책에선 조선시대를 살다간 여러 선비들을 색다른 각도에서 조명하고 있다. 노비 출신으로 형조판서까지 지낸 반석평 등 신분의 벽을 뛰어넘어 선비의 기개를 보여준 이들도 소개하고 있으며, 기인으로만 알려진 토정 이지함이 포천·아산 현감이 됐을 때 펼친 개혁정책의 좌절 과정도 들려준다. 이 밖에 기존 역사 해석에 대해 또 다른 시각으로 해석하고 있는 부분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김영번기자 zerokim@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