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적 상상력으로 풀어낸 ‘혼혈인’

장장 3시간 50분(인터미션 포함)에 걸친 공연이다. 18일부터 2월12일까지 서울 중구 예장동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에서 공연하는 연극 ‘풍찬노숙’은 4시간 가까운 시간 동안 18명의 출연진이 펼치는 대작이다.

서사와 알레고리가 묘하게 얽혀 있는 연극은 언뜻 보면 복잡하지만 기본 뼈대는 명료한 주제의식을 갖고 있다. 바로 ‘혼혈족(순대빛깔 족속)’의 건국신화다.

지난 2004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자로 등단한 김지훈 작가는 2008년 연극 ‘원전유서’로 대한민국 연극대상 작품상과 동아연극상 대상을 비롯, 희곡·연출상 등 5개 부문을 휩쓰는 ‘괴력’을 발휘했다.

이후 ‘김지훈 3부작’으로 불리는 ‘방바닥 긁는 남자’, ‘길거리에 나앉다’, ‘판 엎고 퉤’ 등 작가정신이 선명한 작품으로 주목받아 왔다. 이번 작품 역시 김 작가 특유의 작품세계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연극 ‘풍찬노숙’은 한국 사회의 현재진행형 화두인 혼혈문제를 다루고 있다. 또한 이를 단순히 현실적인 문제로만 접근하지 않고 신화적 상상력으로 풀어내고 있다.

이름없는 혼혈족이 민족적 지위를 인정받기 위해 역사적 출발선을 찾는 과정과 혼혈족에 대한 차별과 불이익, 이로 인해 혼혈된 인간에 내재해 있는 울분을 그리고 있다. 묵직한 주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풍자와 유머를 적절하게 가미, 관객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극의 줄거리는 이렇다. 시골 어느 버려진 땅, 그 가운데는 낡은 북이 있고 언덕 위에는 순대빛깔 얼굴의 광인들이 밤낮으로 쉬지 않고 비료포대를 타며 방황한다. 탁월한 두뇌를 가졌지만 심약한 성격 탓에 그 능력을 포기한 ‘응보’(윤정섭 분)는 물에 빠져 죽을 결심을 한다.

응보와 둘도 없는 친구 사이인 ‘문계’(이원재 분)는 민족 탄생 배경에는 왕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문계는 응보만이 북소리를 두려워하지 않는 유일한 존재라고 부추기면서 그에게 북을 쳐 왕이 될 것을 권고한다. 결국 응보는 장정들과 함께 싸움을 준비하기 위해 길을 나서고, 응보의 아이를 잉태한 ‘주워먹는 그애’(김소진 분)가 금기시되는 북을 친다. 불길한 가운데 응보는 좋은 세상을 새로 펼쳐보고자 전국 혼혈족 백만 군사를 일으켜 진격한다….

김 작가는 “이 연극은 농업인구 감소를 극복하기 위한 외래인구 유입의 분열 단계에서 비롯될 혼란을 미리 다룬 것”이라며 “농경지의 공동화(空洞化)로 인해 기업화된 대지주가 재탄생하고, 단순노동력의 결핍을 메우기 위해 유입되는 이른바 코시안(Kosian)의 불운한 삶에 초점을 맞췄다”고 밝혔다.

김영번기자 zerokim@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