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그리고 희망 - 2012 대한민국 리포트>식민지 수탈도 전쟁도 극복한 나라 ‘한국의 힘 어디서’세계에 가르친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국경없는 교육가회가 교육을 통한 빈곤퇴치 운동을 벌이고 있는 부르키나파소의 현지 마을 모습.

“식민지 수탈을 겪고 전쟁으로 파괴됐지만 다시 우뚝 선 나라는 한국뿐입니다. 이 경험은 우리만의 것이 아니라 세계의 유산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왜 조선왕조실록만 못하고 종묘만 못하겠습니까. 이런 경험을 전 세계에 퍼뜨리는 것은 한국인의 책임이고 이를 통해 세계에서 존경받는 국민이 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서울대는 지난 5월20일 ‘서울대 사회봉사상’ 제2회 수상자로 김기석(교육학·64) 교수를 선정했다. 헌신적인 봉사로 국민과 사회에서 존경받고 대학의 사회적 책무를 다하는 데 기여한 교수에게 수여하는 상이다. 올해 수상자가 된 김 교수는 2007년 국내외 교육가들로 구성된 ‘국경없는 교육가회(EWB·Educators Without Borders)’를 설립해 부르키나파소 등 저개발국에서 교육발전과 빈곤퇴치 운동을 이끌어 왔다.

인터뷰를 위해 지난 5월31일 서울 관악구 신림동 서울대 사범대학 12동에 위치한 교수 연구실에 들어서자 반백의 머리에 풍채 좋은 김 교수가 불청객을 반겼다. 직접 내린 커피를 권하는 김 교수에게 수상 축하 인사를 건네자 “한 일에 비해 너무 큰 상을 줬다”며 겸연쩍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김 교수는 빈곤퇴치 운동에 대한 질문이 시작되자 열혈 청년의 반짝이는 눈빛으로 확신에 찬 답변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김 교수는 “인류의 3대 공적(公敵)으로 빈곤과 무지, 질병을 꼽을 수 있는데 이것을 극복하는 열쇠는 바로 ‘교육’이라고 생각한다”며 “교육을 통해 질병에서 자신을 지키고 공부를 해서 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는다”고 강조했다. 그는 자신이 말한 빈곤이 단순한 추상적 의미가 아니라 하루 소득 1.5달러 이하로 사는 것을 일컫는다며 소득 수준을 이 이상으로 끌어올리는 것이 목표라고 덧붙였다.

빈곤퇴치 문제를 고민하던 김 교수가 가나안농군학교 창설자인 일가(一家) 김용기 선생의 가르침을 시발점으로 주변의 뜻있는 사람들을 모아 국경없는 교육가회를 만든 것은 지난 2007년. 같은 해 그가 빈곤퇴치 운동을 위해 처음 찾은 나라가 서아프리카에 위치한 세계 최빈국이자 문맹률 80%인 부르키나파소였다. 현지에 도착한 김 교수는 처음은 어려운 현실에 놀랐고 뒤이어 그 같은 풍경이 왠지 모르게 익숙하다는 데 또 한 번 놀랐다. 바로 자신이 자라던 1950년대 한국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김 교수는 “‘어, 나도 이런 곳에서 컸는데…’라는 생각이 들었고 ‘저도 한국에서 이런 환경에서 자랐다’고 말하자 주민들도 놀랐다”고 회고했다.

자신감을 얻은 김 교수는 먼저 공용어인 프랑스어를 가르치는 교육센터를 설립했다. 하지만 뿌리 깊은 빈곤 문제는 개인이나 한 단체의 힘만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웠다. 그는 국경없는 교육가회뿐 아니라 아프리카교육개발협회(ADEA), 비형식교육증진회(APENF) 등 교육으로 질병과 빈곤 해결에 접근하려는 단체들과 함께 ‘빈곤퇴치를 위한 국제연대(GAPA)’를 결성했다. 매년 두어 차례씩 부르키나파소를 찾아 현지 정부와 지식인들을 설득하고 교육 프로그램도 소개했다. 결국 현지 단체의 추천으로 4개 마을을 선정해 여성들과 젊은 농민들을 중심으로 문맹 교육과 질병예방 교육, 적정기술 교육 등으로 이어지는 단계적 교육이 시작됐다.

“글자를 깨우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데 그 효과가 6개월을 가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결핵, 에이즈(AIDS·후천성면역결핍증) 등을 피할 수 있는 질병예방 교육을 뒤이어 시행하고 다시 생계를 해결할 수 있도록 소득 창출을 위한 기술을 가르칩니다. 작은 규모의 융자도 해주는데 100달러면 돼지나 양 두 마리를 살 수 있고 4개월 뒤 팔면 200달러를 받을 수 있습니다. 통합적인 접근으로 지속적인 빈곤 탈출을 가능케 하는 겁니다.”

지속적인 사업 진행상황 점검을 위해 한국인 간사가 상주하는 것은 물론 김 교수 역시 방학과 휴가 등을 활용해 매년 두어 차례씩 꼭 현지 마을을 찾았다. 그는 “가면 사람들을 만나 학교는 잘 나오는지, 소득은 어떤지 살피고 온다”며 “6개월마다 주민들을 만나 정말 마음이 변하고 행동이 변하고 있는지 점검한다”고 말했다. 매년 마을을 찾아 주민들과 허물없이 어울리고 흥이 나면 한바탕 춤을 추는 통에 현지에서 김 교수는 한국인 춤꾼으로 통한다. 또 처음에는 어렵고 귀한 손님 정도로 그를 대하던 주민들이 이제는 그를 가까운 가족이나 친척처럼 대하게 됐다.

이처럼 김 교수와 젊은 한국인 활동가들의 끊임없는 설득과 노력 덕에 4개 마을이 서서히 빈곤에서 벗어나기 시작하면서 현지 반응도 뜨거워지고 있다. 주민들은 한국 교육가들이 아프리카에 교육의 중요성을 알리는 모습에 감화됐다. 부르키나파소에서 움튼 변화의 싹을 본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에게서 ‘우리도 도와 달라’는 요청이 쇄도하고 있다. 세네갈에서는 과학 교육을 해 달라는 요청이 왔고 가나는 대학을 세워 달라 부탁해 왔다. 케냐는 교사들의 질을 높여 달라고 요청해 올해부터 관련 사업을 시작할 계획이다.

한국에 대한 인식도 달라졌다. ADEA는 올해부터 2월12일을 ‘한국의 날’로 정했다. 부르키나파소에서 열린 이날 행사에는 부르키나파소뿐 아니라 4개국 대통령이 참석하는 등 교육을 통한 빈곤퇴치 활동에 높은 관심을 보였다. 김 교수는 “행사에서 현지 교육부 장관이 ‘한국이 할 수 있었다면 우리도 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라는 말을 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며 “특히 현지 지식인층에서 한국의 경험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한 경험이라며 높게 평가한다”고 설명했다. 같은 달 13일에는 김 교수가 부르키나파소 대통령궁에 초청받아 블레즈 콩파오레 대통령으로부터 문맹퇴치 등에 기여한 공로로 기사 훈장을 받기도 했다.

부르키나파소에서 가능성을 확인한 국경없는 교육가회의 다음 목적지는 역시 세계 최빈국들인 아이티와 아프가니스탄이다. 두 나라 모두 내전과 자연재해 등으로 사회 기반시설이 모두 파괴된 상태에서 국제사회의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나라들이다. 김 교수는 “바로 한국의 과거 상황과 비슷한 나라들”이라며 “평화 건설과 교육을 통한 재건 등 한국의 사례가 가장 효과적인 해결책이 될 수 있다”고 포부를 밝혔다.

대학시절 내내 취업준비에 매달린다는 요즘 대학생들이 국경없는 교육가회와 같은 국제 봉사단체에 관심이 있는지를 묻자 본인도 신기하다는 답이 돌아왔다. 김 교수는 “사실 저도 신기한 게 월급을 제대로 주는 직장도 아닌데 예상외로 많은 젊은이들이 관심을 갖고 일을 하고 싶다고 찾아온다”며 “이유를 물으면 ‘그냥 하고 싶어요’라고 답하는데 앞으로 우리나라의 미래는 이런 젊은이들에게 달려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국제 봉사를 위한 자격은 외국어 능력과 상대방의 문화를 이해하고 존중할 수 있다면 충분하다”며 “은퇴한 분들도 봉사하려는 분들이 적지 않아 그분들의 경험을 원하는 나라의 프로그램과 연결시켜 주고 있다”고 말했다.

인터뷰 막바지에 앞으로의 개인적인 활동 계획이나 포부를 묻는 질문에 김 교수는 이렇게 답했다. “부르키나파소가 현지어로 무슨 뜻인 줄 아십니까. 바로 ‘고귀한 사람들의 나라’라는 의미입니다. 나중에 교수직에서 물러나면 제게 고향 같은 곳이 된 부르키나파소에 가서 빈곤퇴치와 관련된 일을 계속하면서 생을 마감하고 싶습니다. 우리 집사람이 열악한 현지 사정을 자꾸 걱정하는 통에 아직 최종 결재가 나지 않았지만 말입니다.”

김남석 기자 namdol@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