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7개월, 7만341㎞… 길위에서 꿈을 만나다

세상밖으로 배낭을 꾸려라 / 칸델라리아·허먼 잽 지음, 강필운 옮김 /작은씨앗

인생을 즐기기 충분한 돈, 으리으리한 저택과 좋은 별장, 최고급 자동차…. 한 사람의 삶의 성취를 곧 ‘물질적 소유의 환산가치’로 평가하기 시작한 건 이미 오래된 이야기다. 책장을 넘기다가 ‘물질보다 높은 가치가 있다’는 문구에 매번 밑줄을 치지만, 실상이 어디 그런가. 세상은 너나없이 높은 직위와 거기에 따르는 전리품을 획득하기 위한 무한경쟁의 전쟁터에 다름 아니다. 자칫 주춤거리다가는 낙오되고 마는 전쟁터에서 살아남자니 한때 불태웠던 열망과 꿈 따위는 어디쯤에 묻어버렸는지 자취도 없다. 여기 오래 묵어 쌓인 먼지를 털어내고 새로운 삶의 가치를 찾아 나선 저자가 써내려간 두 권의 책이 있다. 책 속에는 30대 초반에 벌써 평생 쓰고 남을 만한 돈을 번, 돈밖에 모르던 백만장자가 문득 제가 가진 것을 다 버리고 배낭 두 개의 소유물만 갖게 된 사연과 세계일주의 꿈을 이루기 위해 80년도 더 된 낡은 클래식카를 끌고 길 위의 삶을 살고 있는 일가족의 이야기가 있다. 실천으로 보여주는 이들의 삶은 전쟁터에서 노획한 전리품 없이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건 어쩌면 삶의 가치가 아닌 용기에 대한 이야기인지도 모르겠다.

바퀴 휠이 나무로 된 1928년식 고물 클래식카를 몰고 2000년 1월25일 아르헨티나를 출발하면서 저자 부부는 ‘이제(야) 항상 되고 싶었던, 그런 사람이 됐다’고 썼다. 이들이 말하는 ‘그런 사람’이란 과연 어떤 사람일까. 길의 끝에는 무엇이 있는지 알고 싶어하며, 그 길을 가고 싶어하고, 다른 세상에 대해 알고 싶어하는 사람. 그게 부부가 되고자 했던 ‘그런 사람’이었다.

이 부부가 오랫동안 꿈꿔 오며 망설였던 꿈은 일상을 다 내려놓고 6개월 동안 아르헨티나에서 알래스카까지 아메리카 대륙을 종단하는 여행이었다. 왜냐고? 대답이 간명하다. 그냥 원하던 일이었고, 인생의 계획 중 하나였으며, 계획을 실현하지 않는다면 오랫동안 후회할 것 같았으니까. 그래서 일상의 궤도에서 내려온다는 불안과 초조, ‘이후의 삶은 어떻게 될까’ 하는 두려움을 이겨내고 긴 여정을 시작했다. 이들은 일손을 놓고 가진 것들을 다 내려놓자 자유로워졌다고 했다.

그러나 여행은 출발부터 악전고투였다. 고물 자동차는 출발하자마자 20㎞ 만에 문제를 일으켰으며 그 뒤로도 끊임없이 말썽을 부렸다. 숙소를 찾는 데 늘 애를 먹었으며, 국경을 넘을 때마다 번잡한 서류와 절차가 가로막았다. 애초부터 치밀한 계획도 없었거니와 그나마 세워둔 계획마저 늘 빗나가기 일쑤였다.

당초 6개월 예정으로 출발했던 여행은 3년 7개월 보름으로 대책 없이 늘어났고, 주행거리도 당초 예상의 3배인 7만341㎞가 됐다. 그 길 위에서 두툼한 두 권짜리 책이 쓰여졌다.

책은 여행기로 분류되지만 여행지의 아름다운 자연 풍광이나 이색적인 풍물, 이름난 유적지의 구구절절한 소개나 헌사는 드물다. 저자 부부의 관심사는 온전히 사람들이다. 이들은 길에서 만나는 이들과 대화를 나누고, 때로는 자신들을 스스로 들여다보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삶의 본질과 세상에 대한 통찰을 얻었으며, 세상에 대한 희망과 따스한 위안을 받기도 했다. 칠레에서 볼리비아로, 페루에서 에콰도르를 거쳐 코스타리카로, 또 니카라과와 온두라스를 지나면서 저자 부부가 만났던 사람들과의 인연은 에피소드로만 휘발하지 않는다.

볼리비아에서 만난 목동은 부부에게 “당신들이 찾는 게 무엇이냐”고 질문을 던지고, 페루의 티티카카 호수의 물 위 갈대 위에 지은 집에서 만난 한 남자는 “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 가라앉는다”며 “당신이 많이 가질수록 더 많은 문제를 안게 된다”고 말을 건넨다. 그 대화를 곱씹다가 저자 부부는 차에 싣고 다니는 짐의 일부를 버리기로 결심하고, 이렇게 버린 뒤에는 거대한 짐보따리를 내려놓은 기분을 느끼게 됐다고 털어놨다.

저자는 이렇듯 여행에서 만남을 중의적으로 읽어내고 사소한 대화도 자연스레 삶의 문제로까지 확장시킨다. 이렇게 보면 사흘 동안 페루 마추픽추의 트레킹을 지휘하던 가이드의 말도 예사롭지 않다. 험한 길을 걸으며 가이드는 말했다. “이슬비까지 뿌리는 험한 길을 걷고 나면 왜 거기 있는지, 왜 그 산에 있는지, 왜 기차를 타지 않았는지 생각하기 시작할 겁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여러분께 그 이유를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마추픽추에 도착하면 그 이유를 알게 될 겁니다.”

저자 부부는 자신들의 빛나는 여행을 소개하고 있지만, 이러저러한 여행 명소를 꼭 들러 보라는 권유는 단 한마디도 없다. 눈이 번쩍 뜨이는 여행의 요령을 가르쳐주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그들은 이 책으로 독자들에게 과연 무엇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까. 저자는 이 책의 맨 첫장 프롤로그에서부터 ‘독자 자신들이 살아있고, 자신들의 꿈도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느끼라’고 충동하고 있다. 스스로 어떤 삶을 원하고 무엇을 꿈꾸고 있는지조차 잊었거나, 알더라도 주저하는 독자들에게 ‘망설임 없이 감행하라’고 용기를 북돋고 있는 것이다. 평범한 보통사람인 자신들이 다 내려놓고서 원하는 것을 이뤄냈다는 사실을 자랑스레 보여주면서….

박경일 기자 parking@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