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석원의 서울 戀歌>종로서적·고려당·피맛골… 지금은 사라진 ‘마음의 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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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15일. 광주사태로 전국은 초긴장 상태. 서울역에서 대규모 집회가 열렸다. 서울의 대학은 모두 참가한 4·19 이후 최대의 시위였다. 대학생인 나도 시위에 참가했다. 시위대는 서울역에서 출발하여 남대문, 시청, 세종로, 중앙청을 거쳐 청와대까지 진격하려 했다. 대학생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일반 시민들도 합세하여 숫자가 대략 10만 명은 됐던 것 같다. 그런데 시위대는 세종로 동아일보사와 국제극장을 가로질러 있던 경찰 저지대에 막혀 더 이상 전진을 못하고 있었다. 집중적인 최루탄 세례를 맞더니 돌연 나타난 무술 진압대에 그 많은 시위대는 혼비백산하며 흩어지고 말았다. 그들은 청색 상하복을 입고 헬멧은 썼지만 긴 곤봉만 갖고 있을 뿐 보호대도 착용하지 않고 별다른 무장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아주 무서운 존재였다. 군화 대신 운동화를 신고 있었던 그들은 매우 날렵한 무술 유단자들이었기 때문이다.

나도 전열에서 이탈해 정신없이 도망갔다. 쫓아오는 전투경찰들을 피해서 들어간 곳은 종로가 시작되는 곳에 있는 광화문우체국. 나는 하필 교련복을 입고 있어 표적이 될 수 밖에 없는 처지였다. 우체국 여직원들이 빨리 영업대를 넘어 안쪽으로 들어와 우편물 집합장으로 숨으라는 것이다. 그곳엔 우편물들이 산더미 같이 쌓여 있었고 우편물 배달차가 들어오는 곳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거기까지 경찰이 들이닥쳤다. 할 수 없이 그곳을 나왔는데 느닷없이 베이지색 점퍼를 입은 사복 형사가 내 교련복 목덜미를 움켜잡는 것이다. 순간 반사적으로 뿌리치고 죽기 살기로 뛰었다. 종로1가로 해서 무교동 뒷골목 어느 한적한 다방 안으로 들어가 숨었다. 다행히 거기까지 경찰이 들어오진 않았다. 거기서 한참을 숨어 있는데 레지가 다방 안에 있던 한 아가씨를 데려왔다. 애인처럼 서로 팔짱을 끼고 나가면 괜찮을 것이라며. 그녀는 성균관대에 재학 중인 여대생. 시위를 하다가 나처럼 검거를 피해 다방 안으로 피신한 처지였다. 그렇게 우리는 그곳을 나와 명동까지 갈 수 있었고 나는 다행히 운행이 재개된 버스를 타고 불광동 집까지 무사히 갈 수 있었다. 우체국 여직원, 다방 레지, 여대생. 종로가 시작되는 그곳을 지나갈 때면 가끔 그때의 고마웠던 여성들이 생각난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종로1가엔 을지서적이란 대형 서점이 있었다. 1970년대엔 종로2가의 종로서적과 더불어 가장 규모가 큰 서점이었다. 중학생 시절 나는 김찬삼 세계일주와 그때 막 발간한 삼성출판사의 세계문학전집을 즐겨 읽었다. 1974년인지 1975년인지 정확한 연도는 기억나지 않지만 어느 날 저녁 서점 폐문이 임박한 늦은 시간에 책을 사러 을지서적에 갔다. 서둘러 책을 사서는 계산대로 갔는데, 아! 이럴 수가. 여직원이…. 너무 아름다운 그녀의 모습에 나는 숨이 멎는 것 같았다. 그녀의 눈동자. 한눈에 반한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쿵쾅거리는 가슴을 안고 서점을 나왔다. 그러곤 다신 그 서점에 가지 않았다. 그녀에 반한 내 모습을 들킬 것 같아 부끄러웠고 혹여나 그때 잘못 봐 그녀 모습에 실망하지 않을까 걱정돼서였다. 그냥 그 느낌 그대로 그녀를 간직하고 싶었다. 어쨌든 그날이 정말로 마지막 을지서적 방문이 됐다. 그 후론 그날 저녁처럼 한눈에 여성에게 반한 적은 아직 없었다.

을지서적 건너, 그러니까 지금의 스탠다드차타드은행 자리엔 신신백화점이 있었다. 백화점이라고는 하지만 아케이드 정도 되는 단출한 상가였다. 그곳에 일본미술서적을 판매하는 책방이 있었는데 대학생 시절 나는 거기서 주로 전각에 관한 책을 샀다. 전각이란 돌이나 옥, 상아 등에 글자를 새기는 것이다. 독학으로 전각을 공부해 학교 선생님들이나 많은 선후배 화가들께 선물로 주기도 했다. 그런데 전각뿐만 아니라 수영이나 탁구도 순전히 책만 보고 익혔다. 선생님께 배울 경제적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원래 수묵채색화를 전공했다.

지금도 그 분야를 즐겨 그리고 있다. 그러나 지난 이십 년간은 주로 유화로 제작된 작품을 전시회에 출품했다. 그렇지만 실은 누구한테도 유화의 기법을 한 번도 배운 적은 없었다. 그저 책이나 전시된 명작들을 보고 내 나름대로 그렸다.

당연히 시행착오가 많았다. 지금도 능숙하고 세련된 기법을 구사하지는 못한다. 그런 점이 오히려 기존의 방법들과는 차별점이 있는 것 같다는 평을 듣기도 하나 나만의 회화세계가 정립되려면 아직은 꽤 오랜 시간이 더 필요할 것 같다.

신신백화점 뒤편 피맛길엔 싸구려 방석집이 많았다. 1983년 가을 인사동에서 술을 마시곤 2차로 방석집을 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했다. 비가 쏟아지고 있는 화신 앞 건널목을 건너다 신호위반 택시에 살짝 스치며 뒤로 넘어졌다. 안경이 비에 젖어 뺑소니 차의 번호가 보이질 않았다. 다행히 크게 다치진 않아 방석집 아가씨들이 다친 곳을 주물러 준 기억이 난다.

종로2가엔 종로서적이란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서점이 있었다. 교보문고가 생기면서 가장 윗자린 내어주고 말았다. 그곳엔 작은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승강기가 없는 건물이 허다했다. 비좁더라도 5층에 있는 예술서적부까지 꼭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셀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사람들이 종로서적의 책들을 통해 지식의 갈증을 풀었는데 어느샌가 달라진 세태의 변화로 사라지고 말았다. 종로서적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제과의 대명사 종로2가 고려당도 없어졌다. 고려당이 불과 몇년 후에 없어질 거라는 예측을 한 이는 아마도 거의 없었을 것 같다. 종로서적과 빠이롯드 건물 뒷골목은 젊은이들의 거리다. 오래전부터 청춘남녀가 만나 젊음을 즐기는 장소다. 대학에 막 입학한 새내기들이 미팅을 하느라 바쁜 계절은 역시 3월이다. 1980년 3월, 종로2가 뒷골목 지하다방에서 한국외대 2학년에 다니던 내 친구 성식이와 이화여대에 갓 들어간 화실 후배 정희의 소개팅을 주선했다. 정희는 예쁘고 발랄하고 아주 순진한 소녀였다. 그날 엄마 옷인지 언니 옷인지 바바리코트를 입고 나왔는데 무척 어색했다. 바가지 모양의 선머슴 같은 머리스타일로 부끄러워하던 모습이 선하다. 인연은 아니었다. 그 만남이 끝이었다. 청순했던 정희도 지금은 쉰 살이 넘었을 것이고.

아름다운 소녀시절이었는데.

종로서적 건너 YMCA 근처엔 입시 학원들이 많았다. 단과반 학원들이었다. 광화문의 대성학원이나 종로학원, 정일학원은 종합반 학원이고 경복학원, 대일학원, 대영학원, 상아탑학원 등은 단과 전문학원이었다. 대성학원은 1979년에 노량진으로, 대일학원은 서울역 앞으로 이전했다. 단과학원의 최고 인기교재는 송성문의 정통종합영어, 홍성대의 수학의 정석, 그리고 뒤에 나온 해법수학 등이 있었다. 저자는 최용준이었던 것 같은데 확실치가 않다. 안현필의 오력일체나 삼위일체 영어는 유행이 지났다. 나 역시 새벽반에 여러 과목을 수강했지만 마냥 졸다 나오기 일쑤였고 성적엔 별로 도움이 되질 않았다. 특히 나는 수학을 못했다. 공부할 생각도 전혀 안 했다. 당시만 해도 대학 본고사엔 수학을 주관식으로 출제했다. 보통 네 문제에서 여섯 문제 정도 나왔고 고교 3년 내내 본 주관식 모의고사 수학문제를 나는 한 문제도 풀지 못했다.

대광고등학교를 졸업하며 종로2가 끝 금강제화에서 산 구두표를 담임인 물리담당 조정인 선생님께 선물했다. 만 칠천오백 원짜리였다. 선생님은 대학도 합격하지 못했는데 이런 걸 받기가 미안하다며 떠나는 나를 복도 끝까지 씁쓸한 표정으로 배웅 나오셨다. 참 실력 좋고 존경하는 선생님이셨다.

금강제화 뒤 피맛길엔 허름하기 이를 데 없고 간판도 없었지만 대학생들 사이에선 꽤 유명한 대폿집이 있었다.

막걸리 밀주를 만들어 판다는 소문에 밀주집, 문 앞에 전봇대가 있어 봇대집, 간판이 없어 이름 없는 집, 안주로 나오는 이면수가 유명해 이면수집 등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지금은 훨씬 넓어졌지만 여전히 그 자리에서 장사하고 있다. 그땐 찌그러진 황주전자에 막걸리를 담아 내왔는데 언제부터인가 사람수대로 크기가 다른 양푼에 막걸리가 찰랑찰랑 넘칠 듯 담겨 나온다.

아직도 대표안주가 굵은 꽃소금에 찍어 먹는 기름에 지진 이면수다. 내가 유학하고 있을 때 친구 김명국, 오성식, 이천직, 최영신이 그곳에서 술 마시는 장면을 위로한답시고 사진 찍어 파리로 보내온 적이 있었다. 그런데 위로는커녕 마녀의 유혹처럼 더 향수에 빠지고 말았으니. 지금도 가끔 앨범 속의 그 사진을 들여다본다. 귀여운 자식들.

과거뿐만 아니라 지금도 난 종로를 즐겨 찾는다. 내 단골집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전한 열차집 골목 안으로 들어가면 따뜻한 불빛의 둥근 조명이 켜져 있는 남원집이란 작은 대폿집이 있다. 이곳이 내가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서서도 마시는 술집이다. 자리가 없으면 다음을 기약하고 돌아가는 게 상례련만 남원집에선 그럴 수 없다. 체면 불구하고 부뚜막 앞에 서서라도 한잔 해야 한다. 그것도 감지덕지다. 시원스레 막걸리 한잔 들이켜고 이집의 명물 대구조림탕은 못먹더라도 주모가 즉석에서 쓱쓱 무쳐주신 상추무침 한 젓가락이라도 먹어야 직성이 풀린다. 서울 최고의 맛있는 대폿집이다. 이곳에 오면 누구나 다 뿌리 없는 나무가 된다. 너무 맛있어 자꾸 먹다 보니 취하는 건 당연. 그러니 뿌리 없는 나무처럼 흔들흔들거린다. 남원집에선 시건방지게 손님 맘대로 안주를 주문하지 말아야 한다. 그때그때 제철에 나는 맛난 재료를 우리 주모님이 알아서 주는 대로 먹는 게 상책이다. 오늘 찾아가 거나하게 취해 돌아와도 자고 나면 또 생각난다. 보물 같은 나의 단골집이다.

원래는 교보문고 뒤 피맛골에 있다가 재개발한답시고 어이없게도 깡그리 그곳이 헐리는 바람에 지금은 종로 르미에르빌딩 지하에 있는 소문난집이 또 자랑하고 싶은 나의 단골집이다. 이 집은 이름이 많다. 소문난집, 그랜드플라자, 최후의 대폿집이라고 하고 누구는 삼경원이라고도 한다. 놀랄 ‘경(驚)’ 자를 써서 세 번 놀란다는 뜻이다. 첫째, 장소가 너무 누추해서 놀라고 둘째, 이 누추한 곳에 오는 손님들의 면면이 너무 화려해서 놀라고 셋째, 이곳의 주인 서영순 여사의 미모에 놀란단다.

1939년생인 서 여사님은 문인 못지않은 문재와 재치를 가졌다. 그러니 예술가들, 특히 문인들이 바글바글 들끓는다. 문인들의 집합소고 문인들의 도심 속 오아시스다. 새 건물로 이전한 탓에 예전의 소박한 맛은 없어졌지만 주모의 입담과 손맛은 여전하다. 그런데 큰 불행이 있었다. 지난 초봄 여사께서 낙상하셔서 다리를 다친 탓에 가게가 계속 문을 닫고 있다. 한달 후엔, 한달 후엔, 하던 게 벌써 반 년이다. 8월 안에 꼭 다시 문을 열어 그동안 허탕 치고 돌아간 주객들을 다시 모아 예전처럼 시를 읊고 소주를 붓고 뜨끈한 순두부에 몸을 녹이며 우리의 문학과 인생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서울 사람들의 고향은 서울서 이미 사라졌지만 늘 가고 싶고 늘 보고 싶고 항상 맘이 편한 곳이 있다면 그곳이 서울 사람들의 고향이 아닐까. 그곳은 바로 단골집이다. 단골 술집 말이다. 고향 가는 길은 언제나 행복하다. 임금님 수라상 부럽지 않은 고향집 술상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