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 초대석>박칼린 “뮤지컬이 콘서트인가?… 돈만 벌려고 하는 무대 보고 울 뻔”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20대 시절 빼어난 미모를 자랑했던 박칼린 감독은 “당시 가수로 데뷔하자는 말도 들었고, 야릇한 영화에 출연 제의도 받았다”면서 “뭔가 미심쩍은 부분이 있어서 이런 제안들을 모두 거절했다”고 털어놨다. 김호웅 기자 diverkim@munhwa.com

“귀엽고, 애교 있고, 요리도 잘하는데….” 뮤지컬 음악감독 박칼린(45) 씨는 자신이 결코 독신주의자가 아니라며 스스로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왜 아직 독신이냐”는 질문에 “사실 (내가) 되게 여성스러운데 남자들이 접근하지 않는다”며 반농반진으로 털어놓은 말이다.

지난 17일 서울 구로구 신도림동 디큐브아트센터에서 박 감독을 만났다. 그는 이곳에서 한창 공연 중인 뮤지컬 ‘시카고’의 음악감독이자 오케스트라 지휘자로 직접 출연하고 있기도 하다. 뮤지컬 ‘시카고’ 연주단은 무대 중앙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공연에서 빼놓을 수 없는 배우 역할도 맡고 있다. 아주 잠깐이지만 지휘자가 실제 극 중에서 역할을 맡아 연기하기도 한다.

“박 감독이 출연하는 공연엔 중년 남성 관객층이 몰린다는 ‘설’이 있던데”라며 짓궂은 질문을 던지자 박 감독은 “아니, 그런 이야기가 있으면 왜 내게 알려 주지 않아요”라며 ‘반색’했다. 뮤지컬 ‘시카고’와 박 감독의 인연은 남다르다. 그는 지난 2000년 한국 초연 때부터 음악감독 겸 지휘자로 출연해 왔다.

‘시카고’는 올해로 여섯 번째 한국 무대에 올랐다. 그만큼 박 감독의 ‘시카고’에 대한 애정 또한 차곡차곡 쌓여 왔다.

―뮤지컬 ‘시카고’의 이전 공연과 바뀐 점이 있다면.

“‘시카고’는 라이선스 작품이기 때문에 크게 바뀌는 건 없다. 음악이나 줄거리의 변화는 전무하다. 그러나 미세한 점에서 변화는 있다. 주어진 틀 안에서 좀더 세밀하게 ‘클릭’ 조정을 하는 것이다. 초연 땐 원작에 충실하기 위해 대사를 무조건 직역했다. 하지만 이후엔 한국 문화에 걸맞게 조금씩 변화를 줘왔다. 예를 들어 극 중 벨마가 록시에게 ‘법원에 가서 진실을 얘기한다고, 말도 되지 않는 소리하지 마’라고 말하는 대목이 있다. 이를 살짝 바꿔 ‘법원에서 진실을 얘기한다고, 어머 너 참 똑똑하구나’라며 비꼬는 투로 말하는 것이다. 이런 변화는 그날그날의 공연 때마다 살짝 바꾸게 된다. 이처럼 미세한 변화가 쌓이면 전반적으로 업그레이드되는 것이다.”

대사와 가사를 직접 번역하는 박 감독으로선 매우 민감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다. 농담이나 개그를 약간만 넣더라도 극 전반적으로 분위기가 한층 살게 된다. 특히 주인공들이 욕을 하는 대목에서 이를 어떻게 맛깔스럽게 전달하느냐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너무 원색적으로 욕하게 되면 관객에게 오히려 생경하게 느껴지기 때문에 적당한 선에서 다가가는 것이 필요하다.

―뮤지컬 ‘시카고’와 남다른 인연을 갖고 있지만, 특히 ‘립 싱크’ 사건이 유명하다.

“극 중 여장 남자 역할이 있다. 남자 배우가 여장을 하고 나와 연기와 노래를 하다 결국 남자임이 드러나는 것이다. 남자 목소리로 여성처럼 노래해야 하는데 이 배역을 소화할 수 있는 배우는 그리 많지 않다. 2009년 공연 때였는데, 단독으로 이 역을 맡았던 배우가 하루아침에 목이 쉬어 버렸다. 공연 2시간여를 앞두고 긴급 스태프 회의를 열었다. 결론은 당연히 ‘Show must go on(쇼는 계속돼야 한다).’ 다행히 이 배우가 대사는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노래를 대신 불러줘야 하는데 다른 배우를 시킬 수도 없었다. 어떡하겠는가. 극 중에서 유일하게 관객에게 등을 돌리고 있는 지휘자가 노래를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지휘하면서 노래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는데, 정말 헷갈리더라. 단순히 다른 사람의 호흡에 맞춰 지휘만 할 때와는 달리 스스로 노래를 해야 하니,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상상도 못할 만큼 정신없었다.”

박 감독이 이처럼 ‘이중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남다른 이력 때문이기도 하다. 서양음악과 국악을 섭렵한 박 감독은 한때 무대에 직접 서기도 했다. 공연계 신입 시절 부산시립극단에서 연극배우로 활동한 것이다. 지난해 뮤지컬 ‘넥스트 투 노멀(Next to Normal)’에서 주인공인 40대 가정주부 역을 맡았던 것도 이 같은 경험이 뒷받침됐기 때문이다. 당시 박 감독이 거의 20년 만에 배우로 무대에 섰다고 해서 세간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지난해 뮤지컬 ‘넥스트 투 노멀’에 배우로 출연했는데 오랜만에 무대에 섰던 소감은.

“이 공연을 한번 더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번만 더하면 악기와 목청, 느낌 등 ‘부릴 수’ 있는 것을 제대로 할 수 있겠다고 여겨졌다. 극의 도구로 뭐가 더 필요한지 알 것 같아서 이다음에 또 기회가 주어진다면 조금 더 완벽하게 갖출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에 대한 박 감독의 애정이 얼마나 큰지를 짐작할 수 있는 답변이다. 그는 왜 ‘넥스트 투 노멀’에 ‘집착’하는 것일까. 박 감독은 이에 대해 “스토리에 대한 집착은 없다”면서 “40대 여주인공으로 그런 음악과 대사, 그처럼 맛깔스러운 노래를 할 수 있는 배역은 없다”고 했다. 예를 들어 뮤지컬 ‘맘마미아’에서도 비슷한 연령대의 여주인공이 등장하지만, 뮤지컬 삽입곡으로는 부르기 편한 팝음악이 대부분이라는 것. 이에 비해 ‘넥스트 투 노멀’은 “먹고 싶은 것이 잔뜩 차려진 뷔페”라고 박 감독은 비유했다.

박 감독은 알려져 있다시피 무척 바쁜 사람이다. 1인 몇 역을 감당하는지 모른다. 다음달에 열리는 전주세계소리축제, 10월 예정의 콘서트, 연말엔 뮤지컬 ‘아이다’를 무대에 올려야 한다. 게다가 ‘비장의’ 프로그램도 준비 중이다. 내년 3월쯤 전혀 색다른 퍼포먼스 공연을 펼칠 계획이다. 박 감독은 “아직 정확하게 밝힐 수 없다”며 한 발 뺐지만 “한국에도 저런 공연이 있구나는 말이 나올 것”이라고 귀띔했다. 물론 현재로선 10월7일까지 공연하는 뮤지컬 ‘시카고’를 완벽하게 끌고 나가는 것이 가장 큰 과제다.

―이번에 올린 뮤지컬 ‘시카고’는 캐스팅이 화려하기 그지없다. 벨마 역에 인순이와 최정원, 록시 역엔 윤공주와 아이비가 각각 더블 캐스팅됐는데 배우들에 대해 평가하자면.

“인순이와 최정원은 초연 때부터 벨마 역을 맡아 왔기 때문에 충분히 안정적인 연기를 펼친다. 특히 인순이는 꾸미지 않고 있는 그대로 에너지를 드러냄으로써 무대에서 자연스럽게 카리스마를 발한다. 윤공주 역시 연기와 노래가 깔끔하다. 다소 시동이 늦게 걸리는 면이 있지만 이는 생각이 많기 때문이다. 워낙 ‘마인드’가 돼 있어 맡은 역할을 십분 소화해낸다. 아이비는 이번에 새로 뽑았는데, 연습을 시작한 3~4주 동안은 정말 걱정을 많이 했다. 저렇게 해서 무대에 설 수 있을까 할 정도였다. 그런데 어느 날 하루아침에 싹 바뀌어서 나타나더라. 완전히 다른 사람이 돼 등장한 것이다. 그제야 알아차렸다. 아이비는 남몰래 준비했다가 나타나는 스타일이었다. 타고난 ‘끼’가 있어 록시 역을 깜찍하게 소화해내고 있다.”

―‘시카고’ 공연 중에 특별히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나는 무대에서 객석을 보지 않는다. 어릴 때부터 연주와 지휘를 주로 해왔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체질상 객석을 잘 쳐다보지 못하는 편이다. 내 시야에서 스스로 객석을 ‘아웃’시켜야 마음이 편하다. 그런데 며칠 전 처음으로 객석이 눈에 들어왔다. 2층에 자리한 중년 부부가 눈에 확 들어온 것이다. 공연을 마무리하면서 밴드가 피날레 연주를 하는데 박수를 치지 않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보통 하던 때보다 피날레 연주를 두세 번 더했다. 점점 더 크게 연주하니까 마침내 그 부부도 박수를 치더라, 하하.”

한국 뮤지컬은 최근 10년 사이 괄목할 만한 성장세를 보여 왔다. 이 같은 추세는 지금도 진행 중이다. 물론 여기에는 한국 뮤지컬의 태동기에 각고의 노력을 한 이들의 땀과 눈물이 배어 있다. 그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없었다면 오늘날 한국 뮤지컬의 이 같은 성장은 꿈도 꿀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주인공들 중에는 분명 박 감독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런 그에게 “현재 한국 뮤지컬 상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질문을 던졌다.

“정말 고생한 분들이 많지요. 스태프와 배우, 개개인에서부터 집단에 이르기까지 개런티도 제대로 못 받고 한국 뮤지컬의 초석을 깔았던 이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 몇 년 사이 무대를 이용해 돈 벌 생각만 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어요. 이들을 누구라고 지목하지는 않겠지만, 스스로 알 것입니다. 뮤지컬을 무슨 콘서트 식으로 진행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한번은 후배 배우들과 이런 공연에 갔다가 울 뻔했습니다. 너무 분하고 억울해서요. 옆에 제자들도 있었는데, 혹시나 이들이 그런 뮤지컬을 제대로 된 작품으로 여길까 봐 두렵기도 했어요. 결국 공연장에서 도망치다시피 빠져나왔지요. 부디 뮤지컬 관객들이 20여 년간 심신을 다해 공헌해온 이들에게 좀더 많은 관심을 주셨으면 합니다.”

인터뷰 = 김영번 차장(문화부) zerokim@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