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믿을 베스트셀러…독자 아닌 출판사 ‘사재기의 힘’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유명 베스트셀러에 대한 사재기 의혹이 불거진 가운데 서울 종로구 세종로 교보문고 광화문점을 방문한 고객들이 유심히 책을 고르고 있다. 사진은 기사 내용과 관련 없음. 문화일보 자료사진

최근 출판업계에 한 베스트셀러 책에 대한 의혹이 증폭되고 있다. 올해 출간 후부터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주요 서점들이 집계한 베스트셀러 순위에서 장기간 1위를 지키고 있는 S출판사의 에세이가 실상은 해당 출판사의 사재기를 통해 순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 10월 10일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국제 도서전에 참가한 출판계 인사들에 의해 수면 위로 부상한 이 같은 의혹은 삽시간에 퍼져 급기야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출판물불법유통신고센터에서 교보문고와 예스24 등 국내 대표 서점들을 통해 조사에 나서기도 했다. 출판계에서 보기 드문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출판물불법유통신고센터 관계자는 1일 “해당 도서에 대한 의혹이 업계 전반으로 퍼져 조사를 했지만 판매 데이터상으로는 사재기 의혹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를 찾지 못했다”며 “센터의 단속인력이 2명에 불과하고 현실적으로 출판사 내부에서 고발자가 나오는 경우가 아니면 직접적인 적발이 어렵다”고 밝혔다.

해당 출판사는 사실무근이라고 밝혔지만 이 같은 사재기 의혹이 궁극적으로 사실로 확인될 경우 민간 서점에서 집계하는 베스트셀러 순위에 대한 신뢰성 문제가 도마에 오르는 한편, 순위의 신뢰성을 믿고 해당 도서를 구입한 소비자들의 항의도 빗발칠 것으로 보인다.

경기침체가 장기화되면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출판업계에 일명 ‘자뻑’으로 불리는 사재기를 통한 베스트셀러 순위 조작 관행이 근절되지 않고 있다. 한국출판인회의에 따르면 지난 2008년 3229종에 달한 신간 도서는 지난해 2473종으로 23% 감소하는 등 출판업계가 불황의 여파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에 따라 중소출판사들의 시장 진입 장벽이 높아지는 한편, 베스트셀러 위주의 도서 판매 구조가 고착화됐다. 이렇듯 베스트셀러 순위에 오르는 것이 출판사의 생사와 직결되다 보니 사재기 등 부정행위를 통해 베스트셀러 순위를 유지하려는 행태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출판물불법유통신고센터는 지난 10월 9일 도서출판 자음과 모음의 ‘어쨌든 남자는 필요하다’를 사재기 혐의로 적발했다. 해당 출판사는 혐의를 강력히 부인했음에도 문화부는 사재기 혐의가 있다며 과태료 300만 원 처분을 내렸다. 지난해 9월엔 한경BP에서 발간한 ‘바보빅터’가 사재기 혐의로 적발됐다. 이 책은 지난해 2월에 발간된 이래 7개월 동안 꾸준히 주요 서점들의 베스트셀러 상위권에 오른 바 있어 사재기를 통해 순위를 유지했다는 의혹을 피할 수 없게 됐다.

한 대형마트의 전직 도서담당 바이어의 증언도 출판업계에 만연한 순위 조작 의혹을 뒷받침하고 있다. 이 바이어는 “매장에 도서를 들여오기 위해 찾아온 출판업자들로부터 베스트셀러 순위를 쉽게 만들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며 “이때부터 베스트셀러 순위 자체를 믿을 수 없게 됐다”고 털어놨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교보문고와 예스24 등 주요 서점들이 발표하는 베스트셀러 순위의 신뢰도에 의문을 제기하는 소비자들의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1일 서울 종로구 세종로 교보문고 광화문점에서 만난 주용현(28) 씨는 “독자들은 서점에서 발표한 베스트셀러 순위를 대중 문화의 트렌드로 보고 책을 구입하는데 이 같은 순위가 조작된 것이라면 지식을 왜곡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서점과 출판사가 함께 소비자를 우롱하는 처사”라고 말했다. 김은혜(여·29) 씨도 “솔직히 특정 도서가 너무 오랜 기간 베스트셀러 수위를 지키는 것이 의아하긴 하다”면서도 “하지만 소비자들이 객관적으로 해당 도서의 정확한 판매량을 알 수 없어 사실상 모든 정보를 서점에 의존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베스트셀러 순위를 발표하는 서점들은 현실적으로 사재기 같은 불공정행위를 일일이 적발할 수 없음은 인정하면서도 순위의 공정성 유지에 만전을 기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교보문고 관계자는 “베스트셀러를 선정하는 구체적인 기준은 악용될 수 있는 우려 때문에 밝히지 않고 있다”고 해명했다. 이 관계자는 또 “현실적으로 서점이 부정행위를 일일이 적발하기는 힘들어 베스트셀러 순위가 100% 정확하다고 말씀드릴 순 없다”면서도 “특정 도서가 사재기만 가지고 베스트셀러 순위에 오래 남아 있을 수 없으며 결국에는 대중성을 가지고 독자들의 선택을 많이 받은 책이 순위권에 오르는 것”이라고 말했다. 예스24 관계자도 “온라인 서점의 경우 주문수와 판매량에 기초해 매일 순위를 집계하고 있고 주문 이력에 대한 추적이 가능하기 때문에 특정 도서의 사재기는 어렵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 같은 문제에 대해 출판업계에선 사재기에 대한 무거운 처벌과 함께 출판물 유통시장에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고 있다.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은 “일본의 경우 도서정가제가 지켜지고 있고 정부가 독점권을 부여한 전국의 서점도매상들을 통해 실시간으로 특정 도서의 구체적인 판매량을 알 수 있다”며 “국내의 경우 대형 서점들이 도서 판매량을 공개하지 않고 있고, 자신들의 매출과 연관돼 있기 때문에 사재기에 대해서도 적극 대응하지 않고 있다”고 비판했다. 익명을 요구한 출판업계 고위 관계자도 “올해 7월에 사재기 행위에 대한 과태료가 300만 원에서 1000만 원으로 올랐지만 이 같은 방식으로 사재기를 근절하긴 역부족”이라며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영화 관람객을 집계하는 방식처럼 출판 분야에서도 국가가 나서 소비자들에게 정확한 정보를 제공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노기섭 기자 mac4g@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