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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게재 일자 : 2012년 11월 02일(金)
‘비움’ 통해 외양보다 건축에 깃든 ‘삶’을 보라
건축은 효율과 경제 아닌 인문적 가치 추구하는 것 페이스북트위터밴드구글
오래된 것들은 다 아름답다 / 승효상 지음 / 컬처그라퍼

저자가 이 책에서 그랬던 것처럼 시(詩) 한 편으로 시작하자.

책과 똑같은 제목을 달고 있는 박노해의 시다.

“…오랜 시간을 순명하며 살아 나온 것 /

시류를 거슬러 정직하게 낡아진 것 /

낡아짐으로 꾸준히 새로워지는 것 /

오래된 것들은 다 아름답다”

시가 먼저이고 책이 나중이니, 책의 제목은 시에서 빌려 온 것이다.

왜 시 제목을 가져다 달고도 모자라 시의 전문(全文)까지 책의 서문보다 앞에 두었을까.

그건 바로 저자가 건축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바로 이 시 속에 녹아 있기 때문이다.

시가 말하는 ‘오래된 것’은 저자의 사유 속에서 ‘가난한 것’ ‘선한 것’ ‘검박한 것’ ‘비워진 것’ 등으로 변주돼 대치된다.


책장을 넘기다 보면 국내 최고의 건축가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저자가 영국 건축가와 합작해 설계해 지은 서울 장충동의 ‘웰컴하우스’ 건물이 자연스레 오버랩된다. 건축이 추구해야 할 가치와 덕목 등을 다룬 저자의 주장을 읽으면 자연스럽게 그가 설계한 건축물의 면모가 궁금해지리라. 저자가 설계한 웰컴하우스는 적잖이 당혹스럽다. 가장 낯선 것이 벌겋게 녹슨 강판의 종류인 ‘코르텐’을 건물 외장재로 썼다는 점. 고철덩어리 같은 외관 탓에 한때 흉물 취급을 받았으며, 구청의 건축 심의도 간신히 통과했을 정도였다. 저자가 설계한 여러 건물 중에서 유독 웰컴하우스를 꼽은 것은 이 건물이 화려한 외양이나 뛰어난 효율과 기능으로만 건축물의 가치를 가늠해 왔던 시선을 교정해 주기 때문이다.

그가 추구하는 건축이 지향하는 것은 효율과 경제가 아니라 ‘인문적인 가치’다. 예컨대 웰컴하우스의 녹슨 강판으로 치장된 외벽은 자연스레 시간을 보여준다. 붉은 색깔의 녹은 시간이 가면서 암갈색으로 변모하며 시간의 문양을 그려 낸다. 건물은 또 그 자체로 배려와 조화 혹은 나눔을 구현한다. 애초에 건축물은 8층까지 올릴 수 있었지만 5층까지만 세웠다고 알려졌다. 창은 아름다움에 대한 고려보다는 필요한 곳에 냈고, 장식은 절제했다. 나누고 배려하는 건축의 정신은 ‘비움’이 되고 그 비움이 건물을 장식하고 있다.

다시 책 이야기로 돌아가자. 이 책은 여행기의 형식을 띠고 있다. 유럽의 도시와 일본 등 아시아의 도시는 물론이고 경주의 독락당, 순천의 선암사 등을 찾아가거나 추억하면서 건축과 공간의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한다. 여행의 공간에서 오로지 그의 관심은 ‘건축’이다. 그에게 건축이란 그저 건물의 외양이나 도시의 생김새를 말하는 게 아니다. 그에게 건축은 공학이나 예술이 아닌 ‘삶이 진행되는 공간’이다. 도시와 건물, 주택의 공간을 구획하고 동선을 만들어 내는 건축은 어쩌면 삶의 방식을 정해 주는 일에 다름아니라는 얘기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건축 이야기’란 삶의 형식에 대한 깊은 사유다.

저자가 일본 교토(京都)의 료안사(龍安寺) 마당을 방문한 대목을 보자. 료안사 마당은 쇄석이 깔린 배경에다 기기묘묘한 바위를 어찌나 정교하고 치밀하게 배치해 놓았던지 서구인들을 죄다 매료시킨 곳이다. 그러나 저자는 료안사의 마당은 계산된 시각적 미학일 뿐 그 안에 윤리는 없다고 주장한다. 미학적 완성을 위해 료안사 마당의 공간은 철저히 계산된 ‘확정되어진 비움’이 된다. 이는 곧 ‘죽은 비움’이라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그에 반해 우리 한옥 마당은 출퇴근으로 들고나는 시간대에는 대가족의 시끌벅적한 공간이었다가 오후 나절에는 나른한 햇볕만 쏟아지는 ‘불확정적 비움’의 공간이 된다. 저자는 이런 불확정적 비움이 훨씬 더 아름답다고 썼다.

이런 식으로 은둔의 고독을 실현하는 경주의 옛집 독락당과 정반대로 우월의 지배를 추구하는 르네상스시대 이탈리아의 집 빌라 로툰다를 교차해 비교해 보기도 하고, 스위스의 온천욕장과 우리 동해안의 온천호텔을 대비하기도 한다. 이 밖에도 이스라엘, 이집트, 독일, 스페인 등 수많은 국가의 건축을 흥미롭게 다루는데, 기념비적인 건축물로 관광지가 돼버린 곳은 거의 없고 실제 사람들이 사는 골목과 집들에 주로 주목하고 있다.

책 속의 문장은 단순하고 명료하면서도 의미는 핵심에 가깝다. 잘 다져진 글을 읽는 맛도 좋지만, 공간을 바라보는 저자의 미학적 통찰력과 분석력을 엿보는 재미도 각별하다. 전남 순천의 선암사의 무우전 부엌에서 각황전 쪽으로 이어지는 매혹적인 동선처럼 미처 몰랐던 빼어난 공간을 안내받을 수도 있다. 게다가 ‘가짐보다 쓰임이, 더함보다 나눔이, 채움보다 비움이 더 중요하다’는 저자의 윤리적 건축에 대한 태도도 인상적이다.

박경일 기자 parking@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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