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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게재 일자 : 2013년 01월 31일(木)
“이번 시집도 끝 아닌 듯… 詩가 나를 쓰는 느낌이야”
황동규 시인, 15번째 시집 ‘사는 기쁨’ 페이스북트위터밴드구글
늙마에 미국 가는 친구
이메일과 전화에 매달려 서울서처럼 살다가
자식 곁에서 죽겠다고 하지만
늦가을 비 추적추적 내리는 저녁 인사동에서 만나
따끈한 오뎅 안주로
천천히 한잔할 도리는 없겠구나.

허나 같이 살다 누가 먼저 세상 뜨는 것보다
서로의 추억이 반짝일 때 헤어지는 맛도 있겠다.
잘 가거라.
박테리아들도 둘로 갈라질 때 쾌락이 없다면
왜 힘들여 갈라지겠는가?
허허.

(시 ‘이별 없는 시대’ 전문)


황동규(75) 시인이 자신의 열다섯 번째 시집 ‘사는 기쁨’(문학과지성)을 펴냈다. 시를 향한 노시인의 열정이 얼마나 치열한가를 흠뻑 느낄 수 있는 시편들로 가득하다. 한 편 한 편의 시들이 팽팽한 시적 긴장감을 띠고 있어 쉽사리 시집 한 장을 넘기기가 힘들 정도다. 그만큼 시편마다 읽는 이를 빨아들인다는 얘기다. 시집 맨 처음에 실린 시 ‘이별 없는 시대’부터 그렇다.

시인은 1연에서 친구의 미국행에 대한 감회를 담담하게 늘어놓는 듯하다 2연에서 돌연 이별에 대한 안타까움을 해학적으로 뒤집어 보인다. ‘서로의 추억이 반짝일 때 헤어지는 맛도 있겠다’며 짐짓 눙치는 듯하다 ‘박테리아들도 둘로 갈라질 때 쾌락이 없다면/ 왜 힘들여 갈라지겠는가?’라는 대목에서 그야말로 독창적인 시선으로 이별을 바라본다. 그리고 마지막 행 ‘허허’에 이르면 시인은 어느새 인간사의 희로애락에서 한 발 비켜서 있는 경지를 보여준다.

시집에선 인생의 황혼에 들어선 시인의 심사가 손에 잡힐 듯 그려져 있지만 결코 탄식 섞인 회고조가 아니다. 상상력 넘치는 시어들은 오히려 삶의 생기로 가득하다. 예를 들어 표제 시인 ‘사는 기쁨’을 보자. 꽤 긴 분량의 시 ‘사는 기쁨’은 이렇게 끝맺는다. “벗어나려다 벗어나려다 못 벗어난/ 벌레 문 자국같이 조그맣고 가려운 이 사는 기쁨/ 용서하시게.” 문학평론가 홍정선 씨는 이 대목에 대해 “작고 겸손한 욕망을 ‘용서하시게’로 받으며 의미의 진폭을 언어의 극한까지 넓힌 함축적 표현”이라며 “이같이 밝게 빛나는 표현은 오직 황동규만이 만들어내고, 황동규만이 온전하게 구사할 수 있는 독특한 어법”이라고 감탄했다.

또 다른 시 ‘묵화(墨畵) 이불’에서 시인은 노년의 시간에서 삶에 숨겨진 신비를 새롭게 발견한다. 하루는 영하의 기온 탓에 베란다 화분을 데워주려 거실 문을 열어 젖혔다가 거실 바닥에 새겨진 난초 무늬를 보고 한 폭의 묵화가 그려진 이불을 상상한다. 20년간 산 아파트 거실에서 처음 만난 그 묵화에 홀린 시인은 조용히 그 묵화 이불 속으로 들어가 누워본다. 그리고 이렇게 읊는다. “그 속에 들어가 몸을 눕혀 본다./ 내 몸의 넓이와 길이에 얼추 맞는다/(중략)/ 느낌과 상관없이 ‘따스하다’고 속삭인다./ 벌레처럼 꿈틀거려본다./ 지금까지 바른 느낌과 따스한 느낌 가운데 하나를 고르라면/ 늘 바른 느낌이 윗길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지만/ 이 허전한 따스함이 지금/ 식어가는 마음의 실핏줄들을 다시 뎁혀주는구나.” ‘허전한 따스함’. 이야말로 이 시집을 해석하는 열쇠말일 것이다.

황 시인은 30일 문화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나로서는 있는 힘을 다해 썼다”며 “이번 시집을 끝이라고 생각했으나, 아직 끝이 아닌 것 같다”고 소감을 밝혔다. 시인의 말마따나 시집 ‘사는 기쁨’에선 끝은커녕 정점에 서 있는 시인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지난 2009년 펴낸 시집 ‘겨울밤 0시 5분’ 이후 만 4년 만에 신작 시집을 선보였다는 점에서 노시인의 활기찬 창작욕 또한 엿볼 수 있다. 이에 대해 시인은 “시를 쓰다가 시가 나를 쓰고 있다는 느낌을 자주 받곤 했다”며 “한밤중에 깨어 볼펜을 들 때가 특히 그렇다”고 밝혔다. 한마디로 시집 ‘사는 기쁨’은 젊은 시인들이 마땅히 유의해야 할 ‘시작(詩作)에서의 집중력’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김영번 기자 zerokim@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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