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규의 드라마 스캔들>野史에 딱 한줄 ‘공주의 남자’ 상상력에 박수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공주의 남자’의 한 장면(2011. 7. 20∼10. 6 방송·24부작).

그간 나와 별개의 세계였던 드라마가 사장이 되고 보니 달랐다. 드라마들이 선전하면 수익 측면에서 광고가 잘 팔리는 실질적인 경영이익이 생긴다. 또한 밖에서는 드라마가 방송사 위상의 지표가 되기도 한다. 다행히 사장 취임 직후 첫해인 2010년 중반까지는 월화드라마로 ‘공부의 신’ ‘성균관 스캔들’ 반응이 좋았고, KBS의 강점인 수목드라마로 ‘추노’와 ‘제빵왕 김탁구’가 소위 ‘잘나가’ 주었다. 그러나 2010년 말 상대사들이 ‘대물’ ‘싸인’ ‘로열패밀리’로 강세를 보일 때 KBS가 믿고 있던 수목드라마 ‘도망자’ ‘프레지던트’ ‘가시나무새’ 가 연달아 늪에 빠졌다. 그야말로 위기를 만난 것이다.

결국 ‘수목드라마를 살리라’는 사명으로 드라마국장이 교체되면서 올라온 기획안이 바로 ‘공주의 남자’였다. 영어로 ‘Princess’s Man’이라는 제목을 보자 크게 히트한 영화 ’왕의 남자’가 연상되면서 한눈에 매력적인 느낌이 들었다. 첫 방송을 하는 날, 만사 제치고 집에 들어가 텔레비전을 틀었다. 말을 달리면서 활을 쏘는 역동적인 장면이 한눈에 들어왔다.‘이건 되겠다’ 싶었다.

예상대로 25% 이상의 시청률을 기록하며 KBS 수목드라마의 명예를 되찾았다. 당시 주인공 박시후, 문채원은 톱스타 반열은 아니었지만, 애절한 로맨스 연기로 주목 받으면서 일약 주역으로 부상했다. 또 종영 후에도 40억 원 이상의 드라마 해외 판매를 기록하는 수출효자이기도 했다. 오랜만에 일명경인(一鳴驚人)하듯 ‘공주의 남자’는 일대 바람을 일으키며 잠자던 수목드라마를 가뿐히 깨워줬다.

그런데 초반 1, 2회를 보다가 의문점이 생겼다. 김종서의 아들과 수양대군 딸의 사랑이 가능하지 않아 보였다. 정사(正史)는 아닌 듯하고 뭘 보고 썼느냐고 드라마국장에게 물었다.

“김종서 손자하고 수양대군 딸하고 연인 사이라고 야사에 한 줄 남아 있다고 합니다. 스토리텔링 때문에 손자를 아들로 설정해서 세대를 하나 넘어 엮었습니다. 사실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사연을 듣고 비로소 이해가 됐다.

내가 보충해 찾아보니, 1873년 서유영이 기록한 ‘금계필담(錦溪筆談)’의 ‘피눈물로 얽힌 갸륵한 인연’편에 ‘수양대군 딸 세희와 김종서의 손자’의 사랑 이야기가 등장한다. 극의 효과를 위해 정치적 숙적이던 수양대군과 김종서의 자녀들로 재구성한 인물이 ‘공주의 남자’의 이세령과 김승유였다. 공식적으로 기록된 정사와는 달리 민간에서 쓴 야사(野史)이므로 보편적으로 알려진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다. 그럼에도 야사 한 줄에서 힌트를 얻어 스토리를 엮어낸 작가의 능력이 대단해 보였다. 우리 시대극 속에 소위 ‘로미오와 줄리엣’을 엮어 넣은 것은 작가의 뛰어난 실력이라 인정하고 싶다.

또한 배가 침몰돼 사투를 벌이며 빠져나오는 장면도 남달라 보였다. ‘타이타닉’ 영화에서 벤치마킹한 느낌인데 시간적으로 제한된 사극에 그 장면을 접목해 낸 작가의 상상력에 다시 박수를 보냈다.

이뿐만 아니라 이 드라마의 의의는 외주제작사가 아닌 KBS 내부 기획 작품으로, 제작 활성화라는 KGCS 설립 취지에 부합하는 작품이라는 데서도 찾을 수 있다. KGCS(KBS Global Contents Syndication)는 문화전문유한회사로서 ‘추노’ ‘도망자’가 이러한 방식으로 제작됐고, ‘공주의 남자’가 세 번째 작품이었다.

문화전문유한회사(이하 문전사)란 KBS가 직접 제작에 참여하면 투자비나 소유권 면에서 제약이 많기 때문에 핵심 열쇠는 KBS가 쥐고 있되 외주제작사와 50대 50으로 저작권을 나눠 투자하는 것이다. 그 대표는 주로 드라마국 CP급이 맡아 제작을 총괄한다.

추노 문화전문유한회사, 공주의 남자 문화전문유한회사(이하 문전사) 등으로 부른다. 애초에 기대되는 드라마는 ‘문전사’에 KBSN이나 KBS미디어도 참여한다. 그러나 KBS 드라마국과 KBS미디어가 본사와 자회사 형태로 분리돼 있어서 제작과 콘텐츠 관리가 일원화돼 있지 않다. KBS미디어가 제작 기반을 갖추고 있다면 드라마국과 함께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을 듯한데 아직 아쉬운 점으로 남아 있다. 내 생각에는 드라마국장의 임기가 끝나면 KBS미디어로 보내 제작 노하우를 전수해 활용하면 어떨까 생각한다. 그렇게 되면 KBS미디어도 드라마나 예능 프로그램을 자체 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2011년 말 드라마의 여운이 서서히 가라앉을 무렵 ABU 총회에서 에자톨라 자르가미 이란 국영방송(IRIB) 사장을 만났다.

“이란은 아직 여성들이 히잡을 쓰고 다니며 남녀의 애정 표현이 방송 금지 대상입니다. 그래서 한국의 현대물보다는 ‘대장금’이나 ‘주몽’ 같은 역사물이 인기입니다. KBS에도 그런 드라마가 있습니까?”

이 질문을 받자마자 ‘공주의 남자’가 바로 떠올랐다.

“있다마다요. ‘공주의 남자’라는 드라마입니다.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한 ‘한국판 로미오와 줄리엣’ 이야기인데 아주 재밌습니다. 제가 강력히 추천합니다.”

사장으로서 국제회의에 많이 참석하지만 드라마 세일즈를 이렇게 직접 한 것은 ‘공주의 남자’가 처음이었다. 이것이 도화선이 됐는지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이후 ‘공주의 남자’ 해외 수출이 40억 원을 돌파하는 희소식이 전해졌다. 2012년 10월 기준으로 일본, 중국, 홍콩, 대만, 태국, 필리핀, 몽골, 이스라엘, 루마니아 등 15개국에 수출됐다.

특히 일본 NHK 위성방송에서 2012년 7월부터 일요일 저녁 9시에 주 1회 방송됐는데, ‘겨울연가’의 아성도 무너뜨릴 기세를 보였다. ‘겨울연가’ 방송 당시보다 2배 이상의 시청률을 기록한 만큼 ‘제2의 겨울연가’가 될 충분한 가능성을 제시했다.

애초에 우리 드라마를 만들 때 특정 문화권이나 특정 국가에 대한 수출을 겨냥해 만드는 것이 아닌 데도 국적을 불문하고 완성도 높은 작품성과 문화권을 초월한 보편적인 스토리로 공감을 얻는 것이 때로는 신기하다. 단순히 통역이나 번역만으로 전달되기 힘든 것들을 인종과 문화의 차이를 뛰어넘어 우리나라만의 정서를 연기자의 표정, 음악, 카메라의 앵글 등으로 고스란히 전달하는 드라마. 그걸 보고 같이 웃고 울 수 있는 것이 드라마의 매력이 아닌가 싶다.전 KBS 사장

◆ 다음은 ‘적도의 남자’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