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19세기 영국 평민원에서 야당과 여당이 대립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 공리주의자 벤담은 평민원이 나라에서 가장 큰 부자집단이면서도 왕의 과도한 징세에 협력하며 이익을 얻는다고 비난했다. 한길사 제공
근대영국헌정 / 이태숙 지음 / 한길사
한국 의회 민주주의가 표류하고 있다. 민주주의 전범으로 꼽는 영국 헌법정치를 새삼 주목하는 이유다.
영국 헌정은 빛나는 체제인가? 그렇다. 대화와 타협을 통해 풀어가는 영국 의회의 전통, 절대 왕정에 맞서 권력의 남용을 막기 위한 노력,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비판과 토론 등으로 민주주의의 진면목을 드러냈다. 20세기 초까지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세계를 이끌어온 힘 역시 영국 정치체제의 우수성이 만들어낸 부산물이라는 인식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리스 이후 민주정을 가장 먼저 떠올리는 나라가 영국인 것이다.
영국헌정사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인물은 ‘보수주의의 대부’로 꼽히는 버크다. 저자에 따르면 버크의 ‘프랑스 혁명에 대한 성찰’이라는 책은 프랑스 혁명에 대한 논쟁을 불붙게 했다. 버크는 역사 진전과 신의 섭리를 직접 결부시켰다. 현존하는 법률과 제도, 관습을 모두 신의 섭리구현으로 간주하고 이를 신성화하는 데로 나아갔다. 국왕제 폐지, 교회재산 국유화 등에 대한 버크의 비판은 영국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버크는 정치적 변혁의 폐해를 강조하며 현세대를 조상과 후손으로 이어지는 연속의 일부로 표현했다. 이에 대해 여성 해방의 선구자로 알려진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는 버크의 영국 헌정에 대한 애정이 “심약한 자의 동물적 애정과 비슷하다”고 지적했다. 울스턴크래프트는 “가난한 근로대중은 끊임없는 과세에 시달리고 있다. 그들의 땀을 윤활유로 삼아 다름 아닌 부패의 톱니바퀴가 돌아간다”며 영국 통치제도의 결점을 통렬하게 비판했다.
버크보다 흥미로운 인물이 벤담이다. 벤담은 사실 영국 헌정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하지만 그의 왕성한 급진주의 활동과 이론은 밀과 같은 사람에게 이어졌고 이는 영국 헌정을 바꾸는 지렛대가 됐다.
공리주의 철학의 거두였던 벤담은 “세상에서 누구보다 가장 효과적으로 자비로운 사람”으로 평가되기를 바라며 거의 60년 동안 매일 2절지에 15쪽씩 글을 썼다고 한다. 저자는 “통치집단의 주축인 왕과 귀족에 대한 벤담의 고발과 비난은 매우 통렬하면서 집요했다”고 썼다. 국왕을 부패대장이라고 명명하기도 했다. 벤담의 발언이 상당히 신선하다. 벤담은 본인이 나이를 먹었을 때도 젊은 세대들이 오히려 경험이 많다고 주장했다. 느리게 진행됐다고는 하지만 산업혁명기를 살았던 벤담으로서는 새로운 시대는 젊은 세대의 경험이 더욱 풍부하다고 본 것이다. 벤담은 구세대의 경험은 인정하면서도 신세대의 경험은 무시하는 영국 보수주의에 화살을 겨눴다. 만약 벤담이 이 시대에 태어났다면 아마도 스마트폰을 가장 활발하게 다루는 노인이 됐을 것이다. 벤담은 그만큼 변화에 적응하려고 고민하면서 시대를 통찰하려고 노력했다. 75세에도 급진주의자임을 자처한 이 노학자는 인간에 대한 애정을 토대로 영국 헌정이 초래한 부패상과 그것을 이용하는 지배집단을 비판했다. 영국 헌정조차 “상상의 산물, 가짜, 사기”일 뿐이라고 비난했다.
책을 찬찬히 읽어보면 이 같은 비판에도 불구하고 영국 헌정이 공익 우선과 개혁 등의 정치적인 가치를 성공적으로 구현했음을 알 수 있다. 저자는 “근대 영국 헌정의 역사는 공식적 ‘헌법전’이 없는 가운데서도 활발하고 풍부한 헌정 논의를 이어왔다”며 “영국 헌법은 이에 대해 토론하고 논쟁한 학자들에 의해 인식될 수 있었다”고 단언한다. 영국이 모범적 정치제도를 발전시킨 원동력을 영국 엘리트의 품성에서 찾을 수 있다. 책에 따르면 영국 엘리트는 스스로에게 세금을 부과했고, 치안 유지뿐 아니라 복지 임무도 지는 지방관리직을 무보수로 수행했다. 빈민세를 납부하고 학교, 병원, 빈민원 등을 도왔고 살았을 때 뿐 아니라 죽었을 때에도 자비로웠다는 것이다.
반면 한국 엘리트들은 형편없는 평가를 받아왔다. 조선 말기에 우리나라를 방문한 영국인 등은 관리와 양반계층이 “수치심조차 없이 백성의 고혈을 빠는 진드기 그 자체”이며 “기생충과 다를 바 없다”고 기록했다. 하지만 저자는 “영국 엘리트가 태생적으로 훌륭해서가 아니며 벤담이 선동했던 중간계급과 톰슨이 부각시킨 노동계급의 적극적 권리 주장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라고 묻고 있다. 저자는 영국 헌정의 실체를 입체적으로 해부하면서 허상 뒤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비판한다. 책은 영국 헌정의 실체를 다양한 프리즘으로 성찰한 역작이다.
예진수 기자 jinye@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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