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진보의 선구자, 그의 꿈과 좌절

조봉암평전 / 이원규 지음 / 한길사

“우리가 못 한 일을 우리가 알지 못하는 후배들이 해나갈 것이네. 결국 어느 땐가 평화통일의 날이 올 것이고 국민이 고루 잘사는 날이 올 것이네. 나는 씨만 뿌리고 가네.”

국가변란과 간첩죄의 누명을 쓰고 사형을 당한 죽산(竹山) 조봉암(曺奉岩·1899∼1959)이 옥중에서 남긴 유언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북진통일 정책에 맞서 평화통일을 주장한 것이 빌미가 됐던 그의 억울한 죽음은 반세기가 지나서야 신원됐다. 지난 2011년 1월 20일 대법원 전원 합의부는 재심을 열어 죽산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1959년 중국 상하이(上海) 임시정부 시절부터 알고 지낸 후배이자 남북교역을 해온 양이섭의 임의성 없는 자백에 기초한 죽산의 간첩죄에 대해 무죄 판결을 내린 것이다.

이와 관련, 올해 정월 미국의 싱크탱크인 우드로윌슨센터가 공개한 북한 주재 소련대사였던 알렉산더 푸자노프(1906∼1998)의 개인 기록이 눈길을 끈다. 죽산이 죽고 이듬해 일어난 4·19혁명 와중에서 김일성 당시 북한 주석이 예상되는 이승만의 후계자들을 언급하면서 죽산에 대해, “우리도 실수를 저질렀다”고 인정했다는 것. ‘약산 김원봉평전’과 ‘김산평전’ 등 사회주의 독립투사들의 평전을 써왔던 저자(66)는 책에서 “북한이 ‘저지른 실수’가 무엇인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죽산을 파결시키기 위한 역공작이었다면 (죽산의 입장에서는)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일”이라고 밝힌다.

‘잃어버린 진보의 꿈’을 부제로 단 책의 저자는 죽산의 제헌의원 선거구이자 정치적 활동의 기반이었던 인천 출신의 작가다. 평생 리얼리즘 소설을 써온 저자는 자료 수집에만 2년 반, 집필에만 3년이 걸린 책에서 일반적인 평전의 형식을 뛰어넘는다. 소설과 르포가 섞여 있으면서도 철저한 고증과 주석이 뒷받침된 독특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조 씨 문중 등에서 나온 미공개 자료를 포함해 100여 장의 사진과 300여 개의 주석, 200여 개의 참고문헌이 수록돼 있어 자료로서의 가치도 만만치 않다.

저자에 따르면 죽산은 일제강점기 독립투사로 조선공산당 창당을 주도했으며 광복 후 전향해 초대 농림부 장관으로서 농지개혁을 성공시켜 6·25전쟁 당시 한반도 전체가 공산화되는 것을 막은 공로자였다. 진보당 창당에서 볼 수 있듯, 한국에서 ‘진보’라는 말을 정치에서 처음 쓰고 실현하려 한 사람도 바로 죽산이었다.

일제강점기 직전 강화도의 한미한 농가에서 태어난 죽산은 정규학력은 보통학교 졸업이 전부였지만,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화술과 뛰어난 강연술, 탁월한 사회(司會) 실력 등을 스스로 갖추면서 비범한 인물로 성장했다. 고학으로 일본 세이소쿠(正則)영어학교와 모스크바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잠시 수학하기도 했던 죽산은 강화도의 3·1 만세운동에 참여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면서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저자는 평소 죽산이 부르짖었던 책임정치와 정의로운 경제, 평화통일 등 세 가지 이상을, 정치가 실종되고 빈부격차에 남북한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한국의 현실에서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역설한다.

최영창 기자 ycchoi@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