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0년 된 서울… 지리·歷史인물로 ‘들춰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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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서울 / 최종현·김창희 지음 / 동하

저자들의 공력(功力)이 돋보이는 책이다. 서울에 대해 인문지리학적으로 접근하고 있는 책은, 발로 뛴 흔적이 역력하다. 문헌과 자료 열람은 기본이고, 현장 답사와 관련 기록에 대한 세밀한 추적은 읽는 이의 감탄을 절로 자아낸다.

이 책의 특징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장소와 사람의 관계를 역사적 맥락 속에서 종합적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도시와 그곳에서 살았던 사람 사이의 상호작용을 변증법적으로 고찰하고 있다.

좀더 부언하자면, 이 책은 역사적 사실들과 오늘의 상상력으로 펼쳐 보이는 ‘서울의 매혹적인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단순히 답사기나 답사 안내서가 아니면서도 서울, 특히 서촌(경복궁과 인왕산 사이 동네)을 제대로 둘러보고,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정보들로 가득하다. 다시 말해 이야기를 넘어서는 이야기이며, 서울의 어제와 오늘을 이어주는 가교이자 내일에 대한 비전까지 제시하고 있다.

책은 크게 3부로 나뉜다. 우선 제1부 ‘서울의 탄생’에선 서울의 역사적·지리적 원점을 추적하고 있다. 저자들은 ‘서울의 나이는 600년인가 아니면 2000년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이에 대한 해답 찾기를 시도한다. ‘600년 설’은 당연히 조선 건국(1392년)과 한양 천도(1394년)를 바탕에 깔고 있다. ‘2000년 설’은 백제 건국과 관련 있다. 하지만 저자들은 두 가지 주장 모두 타당성 있는 근거를 갖고 있음을 보여주면서도 이와 또다른 결론을 내놓는다.

저자들은 지금의 경복궁 서북쪽 한 귀퉁이를 고려시대 남경 행궁의 자리로 비정(比定)하면서 그곳에 행궁이 서던 시점, 즉 지금으로부터 900여 년 전의 어느 순간을 서울의 탄생 시점으로 파악한다. 지금까지 한 번도 시도되지 않았던 과감한 주장이다. 그러나 저자들이 근거로 제시하는 역사적·지리적 추론은 매우 설득력 있다. 1104년 8월의 어느 날 현 경복궁의 어느 자그마한 언덕 위에서 고려 숙종이 서울 시내를 내려다보던 그 시선이야말로 서울의 출발점이었다는 주장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책의 2·3부에선 ‘서촌’이라는 특정 지역을 당대 이 지역에서 살았던 인물들의 면면과 함께 세밀하게 살펴본다. 우리가 비교적 익숙하게 이름을 알고 있는 역사적 인물들을 내세워 서촌에서의 그들의 삶을 살피되 그 사람이 서촌이라는 장소와 어떻게 유기적으로 결합돼 있는지를 정밀하게 제시한다. 그들이 서촌에 형성한 역사적 지층을 체계적으로 살피는 가운데 그런 흔적들이 다음 시대에 또다른 주인공들에 의해 어떻게 변해 갔는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요약하자면, 조선시대 내내 서촌은 서울 도성 안에서 가장 주목받는 곳 가운데 하나였다. 초기에는 왕족들의 터전으로, 중기부터는 사대부들의 세거지(世居地)이자 서인(西人) 학문과 예술의 발상지로, 후기에는 중인들의 문예운동이 꽃 핀 곳으로 각각 그 특성을 분명히 했다. 사람과 자연이 조화롭게 어울리던 서촌의 풍경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은 1910년 한일병합 이후였다.

한일강제병합은 우리 민족의 운명을 폭력적으로 바꿨던 것과 마찬가지로 서촌의 운명에도 대단히 폭력적인 방식으로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갑자기 친일파들이 서촌에 몰려들어 초대형 저택을 신축하는 가운데 민족적 자각을 가진 서촌의 주인들은 쫓겨났다. 서촌의 사람들과 자연 모두가 몸살을 앓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첫 걸음은 친일파의 대명사로 불리는 이완용의 집이었다. 한일병합 직후인 1913년 옥인동 19번지 등에 들어선 그의 집은 말 그대로 ‘대저택’이었다. 이와 정반대의 대척점에 서 있던 서촌 사람은 김가진이다. 그는 장동 김씨 대대로 살아온 서촌의 보금자리를 초개처럼 버리고 상하이(上海)로 망명, ‘대한제국 장관급 인물 중 유일한 망명객’이 되었다.

저자들은 이밖에도 천재시인 이상과 꼽추화가 구본웅, 윤동주 시인과 국문학자 정병욱, 진보적 민족주의자의 길을 간 형제 이여성과 이쾌대, 현순 목사와 그의 딸 앨리스 현 등 서촌을 거쳐간 아름다운 이들의 발자취도 꼼꼼히 살피고 있다. 한마디로, 이 책은 서울에 아로새겨진 역사적 지층의 굴곡과 결을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다.

김영번 기자 zerokim@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