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경제, 이제는 사회적 기업이다>특수학교 아이들 그림을 상품으로… 꿈 키우는 ‘미술교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27일 서울 강남구 일원동 밀알학교에서 열린 사회적기업 ‘삼분의이’ 미술교실에서 수강생들이 미술교사와 함께 그림을 그리고 있다. 김동훈 기자 dhk@munhwa.com

27일 오후 서울 강남구 일원동의 발달장애 특수학교 밀알학교 미술실.

책상 위에 셰퍼드 모양의 작은 도자기 인형을 올려놓은 예진이(14)가 스케치북에 얼굴을 파묻고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유심히 도자기 인형을 살펴보던 예진이는 어두운 갈색과 검은색이 섞인 셰퍼드의 털을 세심하게 그려 냈다. 예진이는 자폐아동 미술교육 및 디자인 상품 개발을 하는 사회적기업 ‘삼분의이’가 운영하는 미술교실에 3년 반째 참여하고 있는 ‘최고참’ 수강생이다.

이날 열린 삼분의이 미술교실 3클래스는 수업 참여 경력이 짧지 않은 중·고등학생들로 구성돼 있다. 최소 1년 반 이상 수업을 들었던 학생 5명이 3명의 자원봉사 미술교사들과 함께 매주 1회 1시간 10분 동안 그림을 그린다. 그림에 재주가 있는 아이들이 그림 실력을 키우면서 관찰력, 적응력 등을 높일 수 있도록 지도하는 것이 수업의 핵심이다.

이날 셰퍼드 인형을 그림으로 옮겨낸 예진이는 미술수업을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눈으로 본 사물을 제대로 그려 내지 못했다. 직접 본 광경 대신 머릿속에서 재해석해 상상한 이야기를 그리는 경우가 많았다.

예진이 어머니는 “처음에는 자기가 상상한 아주 긴 이야기를 스케치북 한 가득 그려 놓곤 했는데 이제는 사물을 관찰하는 능력이 생겨서 보고 그릴 수 있게 됐다”며 “세밀하게 그림을 그리는 것도 예전에는 못했던 일”이라고 했다.

이날 미술교사의 얼굴을 보면서 초상화를 그리고 있던 우진이(17)도 수업을 듣기 전에는 만화와 게임에서 본 캐릭터를 반복해서 그리는 데에만 열중했다고 한다. 전문가들과 함께 장기간 그림을 그려 오면서 다양한 이미지를 관찰, 표현하는 능력이 키워진 셈이다.

우진이 어머니는 “선생님들이 한 가지에만 빠지지 않게 이끌어 주셔서 다양한 생각을 할 수 있게 된 것 같다”며 “캐릭터를 그대로 그리는 것을 좋아했던 우진이가 ‘남의 것을 똑같이 그리는 것은 좋지 않은 것’이라고 말했을 정도로 많이 달라졌다”고 말했다.

삼분의이를 이끌면서 미술교사로도 참여하고 있는 서현주(32) 대표는 “아이들이 처음에는 교실에 누가 들어오기만 해도 울음을 터뜨렸는데 이제는 누가 들어오거나 말을 걸어도 자기 그림에 집중할 수 있게 됐다”며 “그림을 정말 좋아해서 지금은 쉬엄쉬엄 그리게끔 컨트롤을 해줘야 할 정도”라고 말했다.

전문 미술교육을 받기 어려운 자폐아동을 위해 무료 미술교실을 여는 사회적기업 ‘삼분의이’는 지난 2009년 7월 비영리단체로 출범했다. 달랑 2장짜리 사업제안서를 들고 응모한 서울시의 ‘2030 청년창업’ 지원사업에 선정되면서 사업공간과 지원금을 받은 것이 시작이었다. 대학에서 디자인을 전공하고 대학원에서 ‘예술의 사회적 기능’을 연구한 서 대표가 “예술이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자신감 하나로 1인 창업에 도전한 결과다.

동료도, 직원도 없이 맨땅에서 출발한 서 대표는 아이들을 가르칠 자원봉사자, 교육 장소를 제공할 학교를 찾기 위해 하루 100번 이상 미팅을 하면서 발로 뛰었다. 이곳 밀알학교에서 16명의 아이들과 첫 수업을 열게 된 것이 ‘고군분투’ 2개월 만의 일이다. 육영학교, 한국자폐인사랑협회 등으로 수업을 확대해 237명의 ‘졸업생’을 배출하기까지는 3년 반이 걸렸다. 서 대표 1명뿐이었던 회사는 2명의 직원과 90여 명의 자원봉사자들이 함께하는 조직으로 성장했다.

미술교육 시스템을 성공적으로 안착시킨 삼분의이는 이제 아이들이 그린 미술작품을 기부받아 디자인 상품으로 제작하는 사업 시스템 구축에 나서고 있다. 사회적기업의 핵심인 ‘지속가능한 사업구조’의 출발점인 셈이다.

디자인 상품을 제작·판매한다는 제2의 도전 뒤에는 사회적기업 지원사업을 펼치고 있는 효성그룹이 있다. 삼분의이는 2011년 효성의 사회적기업 지원금 2500만 원을 받아 아이들이 직접 그린 그림을 넣은 첫 번째 디자인 상품 다이어리를 제작했다. ‘시제품’ 성격으로 만든 2000부의 다이어리는 디자인 소품 판매점 ‘1300K’ 등을 통해 거의 전량이 판매됐고, 효성에서도 다이어리 100부를 구입해 사내 이벤트 상품으로 활용하는 등 큰 성과를 거뒀다. 아이들의 그림이 디자인 상품으로 팔려 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된 계기였다.

효성의 지원금은 마땅한 수익구조가 없었던 사업 초기의 삼분의이가 ‘생존’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됐다. 인건비 등으로 사용처를 지정하는 대부분의 사회적기업 지원금과 달리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효성의 지원금으로 삼분의이는 사업 초기 반드시 필요했던 사무실 보증금까지 마련할 수 있었다.

효성의 지원을 바탕으로 기반을 닦은 삼분의이는 이제 그림을 배운 자폐아동들이 성인이 돼서도 그림을 계속 그리면서 디자인 관련 일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아이들의 그림으로 만든 디자인 상품 판매가 본격화하면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공방을 마련한다는 계획이다.

서 대표는 “아이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갈 곳이 없어 자기가 가진 재주를 살리지 못하고 있다”며 “내년부터는 공간을 마련해 그림을 좋아하고 잘하는 친구들만이라도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 수 있도록 해주고 싶다”고 말했다.

김하나 기자 hana@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