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 초대석>“숱한 유혹 있었지만… ‘스캔들 안내겠다’ 아내와 약속지켜”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신영균은 말이 없고 겸손하다. 벼는 영글수록 고개를 숙이고 또 이것이 사람의 경우에도 인용되어 오만을 경계하는 말로 쓰이지만 실상 명성이 높아질수록 겸손하기란 여간한 인품으로는 어려운 것이다. 그의 이같이 묵중한 품성은 선명한 마스크, 부드러운 성음(聲音)과 함께 확실히 한 개의 매력이다.”

1962년 잡지 ‘여원’ 4월호에 소설가 장덕조 씨가 쓴 배우 신영균에 대한 인물평이다. 당시 신영균은 34세. 그로부터 51년의 세월이 흐른 오늘날에도 장 씨의 신영균에 대한 인물평은 여전히 유효하다. 80대 중반의 고령임에도 세월이 무색하리만큼 여전히 건강한 남성미, 젊고 부드러운 목소리, 먼저 나서기보다 상대방의 말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는 경청의 자세, 부와 명성과 권력까지 누릴 것 누리고 가질 것 가져 봤지만 더 깊어진 겸손한 태도….

한 시대를 풍미했던 원로배우 신영균(85) 씨를 최근 그가 명예회장으로 있는 서울 중구 명동 한주홀딩스코리아 집무실에서 만났다. 한국영화의 산증인으로 현재 한국영화인총연합회 명예회장인 신 회장은 2010년 당시 시가 500억 원대에 달하던 명보극장을 사재 출연 형식으로 기부해 우리 사회에 신선한 충격을 던졌다.

지난해 서강대에 10억 원을 예술발전기금으로 쾌척했다. 최근엔 ‘신영균-서울대 발전기금’을 설립하고 제주도의 시가 100억 원대의 대지 6만6000여㎡(약 2만 평)를 기부했다.

신영균예술문화재단은 형편이 어려운 영화·연극인들 자녀에 대한 장학사업과 대학생들에 대한 단편창작지원, 꿈나무 필름아트캠프, 아름다운예술인상 제정 등 다양한 지원사업을 활발히 벌이고 있다.

신 회장은 그러나 기부에 대한 얘기를 쓰지 말아 달라고 신신당부했다. 인터뷰를 하기 전에도, 인터뷰 도중에도, 인터뷰가 끝난 뒤에도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고 했는데, 기부한 사실이 보도되면 자기 자랑으로 비칠 수 있다”며 거듭 ‘보도 자제’를 요청한 것이다. 하지만 귀감이 되는 선행을 널리 알려, 세상을 보다 밝게 만드는 게 언론의 책무. 독자들도 충분히 이해하고 받아들일 것이라고 밀어붙였다. 그의 기부가 결코 ‘자기 자랑’이 아닌 우리사회를 훤하게 비춘 등불로 말이다.

그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와 ‘리세스 오블리주’(부자의 사회적 의무)를 몸소 실천한, 영원한 영화인이자 이 시대에 귀감이 되는 진정한 원로였다.

―수많은 영화에 출연하면서 기억에 남는 영화가 있을 텐데요.

“대종상 등 저명한 영화제에서 수상한 ‘열녀문’ ‘빨간 마후라’ 등의 작품이 기억에 남습니다. 관객동원을 많이 한 ‘미워도 다시 한번’도 잊을 수 없는 영화입니다. 또 위험한 촬영을 한 ‘5인의 해병’ ‘연산군’ ‘임꺽정’ 등도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5인의 해병’ 촬영 때는 실탄을 쏴 지금 생각해도 아찔합니다. ‘연산군’ ‘임꺽정’은 말을 많이 동원했는데, 당시엔 촬영할 때 필요한 말이 없어서 경마장에서 말을 빌려 썼습니다. 수도 없이 말에서 떨어져 고생한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스캔들 한번 없었는데, 그 ‘비결’이 뭔지요.

“당연한 말 같지만 가정을 멀리하고 스캔들을 일으키면 유명인의 인기는 오래갈 수 없다는 게 저의 소신입니다. 권력이 있는 사람이 돈 욕심까지 내면 안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인 게죠. 제 아내가 너무 잘해주고 뒷바라지를 많이 해줬어요. 그런 부인에게 어려움을 안기기 싫었어요. 영화를 시작할 때, 아내와 약속한 게 있어요. ‘당신이 영화배우한다고 했으면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는 아내에게 ‘스캔들 일으키지 않고 가정을 지키겠다’고 약속을 했지요. 이후 영화를 하면서 숱한 유혹이 있었지만 저는 아내와의 약속을 지켰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약속이란 것도 사랑이 없으면 깼을지도 모르는데, 약속을 지킨 저 자신을 보고 제가 아내를 무척 사랑한다는 것을 알았어요.”

―한국 영화가 1960년대에 이어 르네상스를 맞고 있는데요. 한국 영화 부흥의 원동력은 뭐라고 생각하시는지요.

“뭐든 사람이 중요한데, 우리가 영화를 한 시대보다 지금 영화계엔 훌륭한 인재들이 더 많이 몰려들고 있어요. 제작환경도 차이가 많고요. 조금만 신경쓰면 세계무대에서 경쟁할 수 있다고 봅니다. 가요나 드라마는 이미 세계시장에서 인정받고 있잖아요. 60년대엔 한국영화 초창기로 변변한 세트장도 없었고, 냉난방도 되지 않았어요. 컴퓨터 그래픽(CG) 작업은 상상도 할 수 없었고요. 하지만 영화인들의 열정으로 좋은 작품이 많이 나온 것은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당시엔 개봉관도 서울에 10개 정도밖에 없었어요. 개봉관-재개봉관-3봉관 순으로 영화가 배급됐지요. 그래서 관객이 많아야 40만∼50만 명 정도였지요. 지금은 모두가 개봉관으로, 좋은 영화는 한꺼번에 많은 관객을 흡수할 수 있지요.”

―최근 배우 중엔 어떤 배우가 눈에 띄나요.

“연기 잘하는 배우가 무척 많아요. 그중 한 명을 꼽으라면 이병헌을 들고 싶네요. 이병헌은 자기가 맡은 캐릭터에 맞게 연기를 참 잘하는 것 같습니다.”

―살아오시면서 인상적인 에피소드를 소개해 주신다면.

“치과의사에서 배우, 배우에서 다시 정치인으로 여러 인생 경험을 했지요. 또 연기자로서도 머슴부터 왕까지 다양한 역할을 경험했습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 길인지 나름대로 공부도 했습니다. 인생을 어떻게 마무리하는 게 좋을지도 고민하면서 살아갑니다.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회장 시절, 예술인 복지를 위한 예총회관 기공식을 가졌던 게 인상에 남네요. 지난해 가을에는 연극 무대에 섰는데, 부산에 사는 올드팬이 떡을 싸들고 서울까지 올라와 건네주더라고요. 제 가족의 이름까지 정확히 아는 열성팬이 아직도 있다는 사실에 무척 행복했어요.”

―당시 연극 무대에 선 것은 49년 만의 일인데, 심정은 어떠했는지요.

”지난해 서울대 동문들이 연극모임 ‘관악극회’를 창립했다며 찾아왔어요. 회장인 탤런트 이순재 씨가 창립작 공연에 출연해 달라고 요청하길래 선뜻 응했죠. 시나리오를 보니 신부 역할이었고, 제목은 ‘하얀 중립국’이었습니다. 한데 나이 먹어서 그런지 대사가 외워지지 않는 거예요. 이순재 회장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하기 힘들겠다고. 그런데 한 일간지에서 제가 49년 만에 연극에 출연한다는 기사를 크게 실은 거예요. 하는 수 없이 대본이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달달 외워서 출연했습니다. 당시 후배들에게 ‘멋쟁이’라던가 ‘존경한다’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 또 손자 같은 재학생들과 한무대에 서니 젊어지는 것 같기도 하고 기분이 너무 좋았습니다. 오는 9월에 또 작품이 있다며 참여하라고 하는데 난감합니다. 이순재 씨가 저를 염두에 두고 시나리오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대본이 잘 외워질지 또 걱정이 되네요.(웃음)”

―앞으로 영화출연 제의가 오면 응하실 겁니까.

”최근에 문홍식 감독의 ‘리턴’이란 제목의 시나리오가 오는 등 이따금씩 시나리오가 들어오고 있어요. 맘에 드는 게 있으면 꼭 하고 싶습니다. 특별한 배역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영화박물관을 제주도에 세운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신상옥 감독의 ‘마적’ 촬영으로 제주도에서 두 달간 머물렀어요. 그때 제주도의 이국적인 풍광에 매료됐습니다. 나중에 여생을 제주도에서 보내야겠다고 생각했지요. 50년 전인 당시, 3만 평(약 9만9173㎡) 정도의 땅을 샀습니다. 나무도 심고 나름대로 가꾸었어요. 그런데 문득 선진국엔 영화박물관이 있는데, 우리나라엔 없는 상황이 안타까운 생각이 들더군요. 영화박물관을 세우면 내국인은 물론 외국인들에게도 한국 영화를 보여줄 수 있겠다고 생각해서 박물관을 제주도에 세웠습니다.”

―명보극장 등 극장사업에도 손을 댔는데, 사업은 잘 됐는지요.

“친척 중에 극장하는 사람이 있었어요. 그 친척의 권유를 받고 극장사업에 뛰어들었습니다. 1965년에 ‘금호극장’으로 사업을 시작했는데, 무척 잘됐어요. 당시엔 TV가 없어서 사람들이 극장으로 몰렸던 게죠. 제과점 사업도 잘됐어요. 그때 한 해 영화가 200여 편 제작되던 시절이었습니다. 하지만 개봉관은 10개뿐이어서 영화관 잡기가 ‘하늘의 별따기’였습니다. 개봉관 극장을 운영하고 싶은 마음이 컸지요. 70년대 후반 명보극장 사장이 매수할 생각이 없냐고 하더군요. 주저없이 극장을 맡았습니다. 관객들이 폭발적으로 들어왔습니다. ‘빨간 마후라’ ‘연산군’ 등 빅히트작도 많이 상영했고요.”

―치과의사에서 영화배우와 사업가, 국회의원까지 영화 속 배역만큼 다양한 삶을 사셨는데요. 지난 인생을 회고하신다면.

“어렸을 적엔 고생이 심했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저를 공부시켰지요. 그래도 배우의 꿈이 있었기에 고생을 고생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후 치과의사가 되고 배우를 하고 정치인으로 변신하기도 했는데, 돌이켜보면 하나님의 축복을 너무 많이 받은 것 같습니다. 배우 시절, 정말 많은 팬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또 사업을 해서는 돈도 많이 벌었지요. 좋은 일을 해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받은 사랑을 돌려주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평소 건강관리는 어떻게 하시나요.

“몸 관리를 열심히 하고 있어요. 하루에 1시간∼1시간 30분 정도 꾸준히 운동하고 있습니다. 러닝머신에 올라가 30분 정도 달리기 한 뒤, 근력운동도 빼지 않고 하고 있습니다. 만보기를 항상 차고 다니는데, 하루에 만보까지는 아니어도 7000∼8000보 정도는 걷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아직 체력이 괜찮아요. 최근엔 18홀 라운드를 카트를 타지 않고 했어요. 라운드가 끝나니 다리 근육이 좀 뻐근하긴 했어요. 당뇨가 있어서 적게 먹고, 단것은 입에 안 대는 등 식사조절도 철저히 하고 있지요.”

―좌우명은.

“근면, 검소, 겸손 이 세 가지가 제 생활 철학입니다. 돈 좀 있다고 해서 불필요하게 돈을 펑펑 쓰거나 부자티 내는 건 저와 맞지 않아요. 항상 정해진 시간에 출근하고 꾸준히 운동하며 즐겁게 살려고 노력합니다.”

인터뷰 = 김도연 차장(문화부) kdychi@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