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일한 사유를 한 중화론자와 문명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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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사상사의 미래를 위하여 / 이경구 지음 / 푸른 역사

‘한 시대의 풍습이나 유행’을 뜻하는 말로 18세기에 정치·사회학적으로 새롭게 등장한 ‘시체(時體)’라는 용어가 있다. 조선 제21대 왕 영조(재위 1724∼1776)가 이 말을 자주 사용했는데, 주로 18세기에 나타난 서울 중심의 도시화, 사치와 유흥, 세련된 문화 풍조 등을 지칭했다. 시체라는 용어는 20세기 초 서양식의 급격한 변화를 겪으며 다시 반짝 주목을 받았으나 점차 ‘모던’과 ‘유행’이란 말에 밀려났다. 지금도 국어사전에 실려있긴 하지만, 일상에서는 ‘시체병(時體病·돌림병 또는 유행병)’ ‘시쳇말’ 정도를 제외하면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서구의 개념사를 조선 후기 이후 한국사에 적용한 저자(한림대 한림과학원 HK 교수)는 18세기 시체란 용어의 부상과 1930년대 시체와 모던의 혼용 사례에서 ‘도시화·새로움·변화’라는 유사한 측면들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 독일의 저명한 역사학자 라인하르트 코젤렉이 주창한 개념사적 접근을 통해 용어는 다르지만 내용이 비슷했던 역사 경험들을 적절하게 해석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서양 근대와 동아시아 전근대’라는 도식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책은 저자가 한림과학원의 프로젝트인 ‘동아시아 기본 개념의 상호소통 사업’에 참여한 결과물이다. 조선 후기 사상사 전공자답게 저자는 근대 이후 번역된 신조어나 새로 의미를 부여받은 개념 대신, 실학·이용후생·시체·유속(流俗) 등 전근대부터 존재했던 개념들에 주목해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기존 학계의 근대에 관한 논의는 서양 근대의 수용과 정착, 내부에서 자발적으로 성장한 근대 찾기, 근대의 상대화 작업, 단선적 근대가 아닌 다양한 경로의 근대 찾기 등 4가지 흐름으로 요약된다. 르네상스부터 19세기 산업화까지 서구에서도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근대의 적용시기가 고무줄임을 지적한 저자는 결국 중요한 것은 근대가 아니라 ‘근대 개념’이 문제임을 지적한다.

저자에 따르면, 중국에서 기원한 중화(中華) 개념은 고려 후반 이래 한국에서도 문명의 주류적 상징이 됐다. 특히 17세기 명·청 교체기를 경험하며 소중화를 자처했던 조선에서는 홀로 남은 유교의 명맥인 조선에 중화를 실현해 이를 계승하자는 ‘조선중화주의’가 등장했다. 저자가 제기하는 흥미로운 가설은 17세기의 중화건설론자와 19세기 문명개화론자들의 성리학과 기독교에 대한 쏠림이 유사하게 반복되고 있다는 점이다. 저자는 “가치의 내면화와 그에 따르는 행동을 유발하는 신념화 단계에서 한·중·일 동아시아 3국의 선택은 달랐다”며 “전통적으로 중국은 여러 종교를 회통(會通)하는 경향이, 한국은 보편적 일교(一敎)로 단일화하는 경향이, 일본은 보편 종교의 일본화 경향이 강했음을 지적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최영창 기자 ycchoi@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