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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게재 일자 : 2013년 06월 24일(月)
살아온 날 돌아보고, 걸어갈 길 응시하다
耳順 넘긴 두 시인 시집 나란히 나와 페이스북트위터밴드구글
삶과 죽음을 고즈넉히 응시하는, 60대 두 시인의 시집이 나란히 나왔다. 김명인(67) 시인의 신작시집 ‘여행자 나무’(문학과지성)와 정호승(63) 시인의 시집 ‘여행’(창비)이다. 공교롭게도 두 시인 모두 삶의 여정을 ‘여행’에 빗대며 살아온 날을 찬찬히 돌아보고,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에 대해 담담한 눈길을 보내고 있다. 명징한 시 정신이 또렷이 살아 있는 시집들이다.

늙어가는 아버지를 용서하라
너는 봄이 오지 않아도 꽃으로 피어나지만
나는 봄이 와도 꽃으로 피어나지 않는다
봄이 가도 꽃잎으로 떨어지지 않는다
내 평생 꽃으로 피어나는 사람을 아름다워했으나
이제는 사람이 꽃으로 피어나길 바라지 않는다
사람이 꽃처럼 열매 맺길 바라지 않는다
늙어간다고 사랑을 잃겠느냐
늙어간다고 사랑도 늙겠느냐

(정호승 시인의 시 ‘산수유’ 전문)


‘여행’은 지난해 등단 40년을 맞은 정 시인이 스스로 이를 기념해 펴낸 시집이다. 일상의 평이한 언어로 맑고 투명한 시 세계를 펼쳐온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도 자신의 장기를 유감없이 발휘한다.

시집에 실린 79편의 시 중 50여 편은 미발표 신작시. 그 만큼 시인의 창작욕이 여전함을 보여준다. 하지만 시집에 실린 시편들엔 어느덧 이순(耳順)을 훌쩍 넘긴 시인의 처연한 심사가 곳곳에 묻어 있다.

앞서 인용한 시 ‘산수유’에서도 엿볼 수 있지만 시 ‘불빛’에서도 시인의 이 같은 애상(哀想)이 여실히 드러난다. “때때로 과거에 환하게 불이 켜질 때가 있다/ 처음엔 어두운 터널 끝에서 차차 밝아오다가/ 터널을 통과하는 순간 갑자기 확 밝아오는 불빛처럼/ 과거에 환하게 불이 켜질 때가 있다/ 특히 어두운 과거의 불행에 환하게 불이 켜져/ 온 언덕을 뒤덮은 복숭아꽃처럼 불행이 눈부실 때가 있다/ 봄밤의 거리에 내걸린 초파일 연등처럼/ 내 과거의 불행에 붉은 등불이 걸릴 때/ 그 등불에 눈물의 달빛이 반짝일 때/ 나는 밤의 길을 걷다가 걸음을 멈추고 잠시 고개를 숙인다”(시 ‘불빛’ 중에서)

정 시인은 “지금까지 나는 시가 있었기에 살아올 수 있었다. 만일 시가 없었다면 내 인생의 의미와 가치를 찾기는 힘들 것”이라며 “남아 있는 삶 동안 여전히 시의 눈으로 세상과 인생을 바라보고 생각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이라고 밝혔다.


갈 데 없어 한나절을 베고 누웠는데
낮잠인가 싶어 설핏 깨어나니
어느새 화안한 석양이다
문턱을 딛고 방 안으로 스미는 가을 햇살들
먼 길 가다 잠시 쉬러 들어온
이 애잔, 그대의 행장이려니
움켜쥐려 하자 손등에 반짝이는 물기
빛살 속으로 손을 디밀어도 온기가 없다

(김명인 시인의 시 ‘상강’ 중에서)


올해로 등단 40년을 맞은 김 시인의 시 세계를 관통해온 것은 ‘몸의 기억’이다. ‘김명인 시’에 등장하는 이들은 대부분 고향을 잃고 부랑의 운명을 걸머진 채 헐벗은 길 위에 선 사람들이었다.

이번 시집엔 어느덧 노년에 이른 시인이 스스로 변화된 몸에서 길어 올리는 깨달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낙인처럼 찍혔던 트라우마도 희미해지고, 그 대신 죽음이라는 또 다른 어둠이 생생하게 다가온다. 하지만 빛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어둠이 충만해지는’ 시간으로 시인은 늙음을 받아들인다. 아울러 몸에 새겨진 상처들과 그 방랑의 시절마저 무한한 사랑으로 감싸안는다.

예컨대 김 시인은 시 ‘황금 수레’에서 이렇게 읊는다. “세상 끝까지 떠돌고 싶은 날들이 있었다/ 마침내 침상조차 등에 겨웠을 때/ 못 가본 길들이 남은 한이 되었다/ 넘고 넘겨온 고비들이 열사(熱砂)였으므로/ 젊은 날의 소망이란 끝끝내 무거운/ 모래주머닐 매단 풍선이었을까?” 그런가하면 시인은 “되는 대로 미끄러져가며 터뜨렸던/ 내 삶의 어떤 폭죽들/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잠깐 일어섰다 부서지던 파문을/ 저도 안다는 것일까/ 모르는 사이에 사십 년이 꼬박 흘러갔다!”(시 ‘살이라는 잔고’ 중에서)라고 털어놓는다. 마침내 시인은 죽음과 대면하는 자신을 응시한다. “거기 누구요, 문 열고 내다보지 않아도/ 누구나 시시로 방 안에 우뚝 선 죽음의 민얼굴과 마주친다”(시 ‘민얼굴’ 중에서).

김영번 기자 zerokim@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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