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이 쓴 역사 ‘라틴문명 6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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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신세계 / 숀 윌리엄 밀러 지음, 조성훈 옮김 / 너머북스

2006년에 국내 개봉된 영화 ‘아포칼립토’에서 인상적인 장면은 산 사람을 붙잡아 눕혀놓고 칼로 그의 가슴을 가르는 장면이다. 멜 깁슨 감독의 문제작이다. 마야, 아즈텍 문명권에서는 진짜로 그 심장을 먹었다는 얘기가 전한다. 영화 ‘아포칼립토’는 잔혹하고 끔찍한 장면으로 악명이 높지만 유럽에 의해 멸망하기 직전의 마야 문명을 생생하게 묘사했다는 호평도 잇따른다. 고대에 번성했던 잉카, 마야, 아즈텍 문명은 눈부신 번영을 이룩했지만 스페인 침략으로 하루아침에 멸망한 비운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아즈텍인들은 사람을 먹었다. 저자는 식인(食人)의 이유를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했다. 아즈텍인은 자연과 인간을 동등한 존재로 봤고, 동물을 먹을 수 있다면 사람도 먹지 못할 까닭이 없다고 믿었다는 것이다. 아즈텍에서 사람을 바치는 인신공양은 인구가 느는 것을 어렵게 했다. 인신공양으로 수천 명이 목숨을 잃었는데 그 태반이 청년이었다. 이로 인해 결국 국가 전체의 출산율이 하락했다.

스페인 점령 이전의 아메리카 원주민의 역사는 여전히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다. 이 같은 옛 라틴 아메리카 역사를 요리하는 저자의 솜씨가 탁월하다. 책은 아메리카 원주민 역사 연구와 사회학적 조사분석, 탐험적 시각을 입체적으로 종합했다. 아즈텍의 식인행위에서 오늘날 대기오염으로 유명한 멕시코시티의 ‘숨쉬기투쟁’에 이르기까지 600여 년에 걸친 라틴 아메리카의 환경사이자 문명비평서다. 라틴 아메리카 역사의 변곡점에서 환경이 핵심 지렛대 역할을 했음을 보여준다. 인간이 역사의 바퀴를 굴려온 주역이었다는 추측을 뒤엎고 라틴 아메리카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펼쳐 보인다.

책은 수 세기에 걸친 라틴 아메리카 환경사를 굽어보면서 아메리카 옛 문명이 더 힘찬 것이었고, 숨 막히는 공해로 찌든 오늘날 문명이 잠재적으로는 더 취약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저자는 “최근에야 우리는 자연을 우리와 희생을 함께 겪는 동료로 본다”며 “사람도 멸종 위기 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야 문화와 자연은 합의점을 찾았다”고 썼다.

저자는 현재의 환경 문제의 뿌리로 옛 아메리카 문명의 탐욕을 지목하기도 한다. 아즈텍과 잉카 귀족들의 사치는 자연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숲이 사라졌고, 짐승을 사냥해 깡그리 없앴고, 땅을 깎아 물욕을 채웠다.

책이 소개하는 이들의 과시 소비성향과 욕망은 상상을 초월한다. 아즈텍 목테수마 2세의 아내는 1000명에 달했고, 그 가운데 150명은 항상 임신상태였다. 잉카에는 이상한 관습이 있는데 왕이 죽으면서 후대 왕에게 아무것도 물려주지 않는다는 것. 미라가 된 왕들이 모든 재산을 그대로 지켰다. 공물 요구량이 생산량을 앞지를 수밖에 없었던 요인이었다.

책은 자연과 인간의 상호작용을 라틴 아메리카의 중요한 역사적 사건과 연결 지으며 설명한다. 아메리카 선주민족의 문화를 군사기술이나 생산기술면에서 열등한 것으로 보는 편견에도 일침을 놓는다. 유럽 정복자들이 도달하기 전에 라틴 아메리카 대륙은 거의 텅 빈 야생 상태였다는 기존 오해도 푼다. 라틴 아메리카 선주민족 문명과 이베리아 왕정이 다스리던 아메리카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내렸다는 데 이 책의 의의가 있다. 옛 라틴 아메리카인들은 구대륙보다 뛰어난 농법으로 많은 인구를 먹여 살렸다. 저자는 “1492년 아메리카는 사람으로 우글거렸고 풍경 구석구석에 사람의 손때가 묻어 있었다. (중략) 아메리카 문화 또한 여러 훌륭한 농업을 연이어 만들어냈고, 그러한 (열대) 농법들이 대지의 모습을 바꿔놓았다”고 지적한다. 유럽인 식민자들이 오기 전에 칠레 지역에서 식량생산 활동을 하지 않았다는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책 ‘총·균·쇠’의 주장이 아메리카 선주민족 문명에 대한 편견으로 인한 오류임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책은 1492년 ‘신대륙 발견’ 때만 하더라도 라틴 아메리카의 인구는 4000만∼7000만 명(최대 1억1500만 명까지도 추정)에 달했다고 지적한다. 아즈텍 제국의 도시인 테노치티틀란 등에는 20만 명이 넘게 살았는데 당시 파리, 런던, 리스본보다 컸던 셈이다.

유럽인 정복자를 따라온 병원균과 동식물이 라틴 아메리카 옛 문명을 무너뜨렸다. 유럽의 병원균은 이에 대한 면역이 약했던 원주민 몸을 상대로 전무후무한 정복 전쟁을 펼쳤다. 1492년부터 100년이 지나는 사이에 원주민 5000만 명이 사라졌다. 4000년 넘게 뛰어난 문화를 일궜던 아메리카 인구가 90% 넘게 사라진 것이다. 살아남은 사람은 겨우 500만 명뿐이었다. 책은 인류사에 전례 없는 참사였고 자연의 완승이었다고 꼬집는다.

사람이 사라진 땅 위를 토착 동식물과 유라시아에서 들어온 식물종이 함께 덮어가기 시작했다. 숲이 되살아났다. 문화혼혈이자 생태 혼합물인 아메리카 신대륙을 만든 진짜 주인공은 이베리아인 정복자들이 아니라 자연이었던 셈이다. 이 지역에서 인간 종이 이전 인구 수에 이르기까지 4세기가 걸렸다. 19세기 라틴 아메리카에서도 열대 질병이 끈질기게 인간을 괴롭혔다. 책은 라틴 아메리카가 수출을 통해 발전을 하려 했을 때 등장한 장애물로 18세기 유럽이 만들어낸 인종주의와 지진·화산폭발 등 자연재해와 함께 열대 질병을 꼽고 있다.

저자는 현대 라틴 아메리카의 환경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인구의 절대다수가 사는 도시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책의 마지막 부분을 장식하는 것이 쿠바의 농업혁명 이야기다. 쿠바에서는 도시의 버려진 땅은 물론 집과 아파트의 뒤뜰, 발코니와 지붕에까지 채소밭을 만들었다. 쿠바 농부들은 여러 다른 작물을 돌려가며 심는 법을 수십 가지나 개발해 땅심을 키웠다.

저자는 에너지 생산 확대를 만병통치약으로 여기고 여기에 집착하는 어리석음도 날카롭게 비판한다. 에너지 생산 확대를 통해 끝없는 탐욕을 채우려 하기보다는 슬기롭게 아껴 쓰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강조한다. 에너지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는 우리 사회에 커다란 메시지를 던지는 책이다.

예진수 기자 jinye@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