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개방”… 조선의 미래 꿈꿨던 뜨거운 외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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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학의 / 박제가 지음, 안대회 교감 역주 / 돌베개

18세기 조선 실학자인 초정 박제가의 사고는 독창적이고 진취적이었다. 때로는 엉뚱한 말을 툭툭 던지기도 했는데 그의 사고가 얼마나 창조적이었는지 직감하게 한다.

“밥을 먹여주지는 않지만 마음을 흡족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산수(山水)와 산수화(山水畵)는 같은 것이야.” “그물에 잡혀 뭍으로 나온 물고기는 사람을 보면서 걱정하겠지. ‘너희 인간들은 물이 없으니 곧 죽을 거야’라고.”

그의 문집에서는 이런 유의 말들이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온다. 그는 이런 발상법으로 현실의 문제를 꿰뚫어보고 담대한 대안을 제시했다. 더 극단적 주장을 내놓기도 했다. 요즘 ‘영어 공용론’과 비견될 수 있는 ‘중국어 공용론’이 그것이다.

‘수레’(車)로 대표되는 운송수단의 혁신과 통상 무역을 헌걸차게 주장했다. 청나라 문물의 수입을 주장했지만 어디까지나 청나라가 일본 오키나와(沖繩), 서양 제국 등과 활기차게 교역하고 있다는 점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개혁 개방론자’였던 박제가의 손끝에서 뽑아져 나온 ‘북학의’는 미래성이 샛별처럼 반짝이는 책이었다. 1786년, 정조가 관료들에게 소회를 글로 써서 바치라는 어명을 내리자 박제가가 올린 글은 ‘경세문자(經世文字)’의 백미다. 그는 ‘죽을죄를 무릅쓰고 삼가 말씀을 올린다”며 이런 글을 썼다.

‘저 놀고먹는 자들은 나라의 큰 좀벌레입니다. 놀고먹는 자가 날이 갈수록 불어나는 이유는 사대부가 날로 번성하는 데 있습니다.’(북학의 외편)

이로부터 12년 뒤에는 “선비라는 무리가 나라 인구의 과반수를 차지한 지 100년이 됐는데 날마다 불어나는 선비를 도태시키지 않고 반대로 날마다 힘을 잃어 가는 농부만 꾸짖고 있다”며 혁명적인 ‘선비도태론’을 제기한다. 북학의를 쓰기 시작한 시점은 그의 나이 29세 때였다. 패기와 당당함이 느껴지는 글들이 가슴을 친다. 미야지마 히로시 성균관대 교수는 ‘북학의’가 집권 벌족을 비판하기 위해 집필된 저작이었다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안대회(한문학) 성균관대 교수의 ‘완역 정본 북학의’는 20여 종의 사본을 교감하고 주해하는 작업을 거쳐 탄생한, 말 그대로 ‘정본(定本)’이다. ‘북학의’의 제대로 된 완역은 이 책이 최초이다.

‘북학의’는 조선시대에 나온 사상서를 포함해 고전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경제발전안 중 하나다. 세계로 향해 문호를 열어 우리보다 나은 문화와 제도, 기술을 배운 뒤 부국강병과 윤택한 생활을 성취하자는 박제가의 주장은 당대 어느 책과도 견줄 수 없다.

안 교수는 “박제가의 경고는 오늘날에도 현실적인 의의가 있다”면서 “국제 정세가 안정된 시절에 주체적으로 개혁을 실행하지 못한다면 바로 국가 위기로 이어진다는 경고를 내리는 박제가의 목소리는 한국의 현실 속에서 지속적으로 반추할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위기에 봉착한 조선 사회의 현실에 대한 통렬한 분석과 자기부정을 통해 미래를 설계하고자 한 뼈아픈 자각과 통찰의 저작이라는 것.

박제가는 “중국의 배하고만 통상하고 해외의 많은 나라와는 통상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이것은 임시변통하는 책략에 불과하고 정론(定論)은 아니다. 국력이 조금 강성해지고 백성들의 생업이 안정을 얻은 상황에 이르면 마땅히 차례대로 다른 나라와도 통상을 맺어야 한다”고 했다. 중국과 일본은 학습과 개방과 통상의 1차 목표이고 궁극의 목표는 전 세계로 확장하는 데 있음을 밝혔다.

베이징(北京)을 다녀온 뒤 조선의 운송을 대대적으로 확대해야 한다고 생각한 박제가는 ‘북학의’에서 수레를 ‘능행지옥(能行之屋)’, 즉 움직이는 집이라고 표현한다. 그런데 이후에 나온 박지원의 ‘열하일기’에서도 같은 표현이 나온다. ‘북학의’는 박제가가 골방에 틀어박혀서 쓴 것이 아니라 당시 지식인들과 수없이 토론하고 고민한 것에 자신이 직접 보고 느낀 것을 녹여서 만든 저작물임을 보여주는 방증이다.

‘완역 정본 북학의’는 학술번역의 표본이 될 만한 책이다. 안 교수는 10여 년간 국내는 물론 일본 ‘덴리(天里)대’에 소장된 금서본(今西本), 미국 버클리대에 소장돼 있는 버클리본 등 각 이본들의 차이를 밝혀내고, 교감작업을 벌이면서 놀라운 집중력을 발휘한 듯하다. 어지간한 번역서의 10배나 되는 방대한 주석은 어느 하나 버릴 것이 없다. 그 해석 속에서 18세기 후반의 사회사가 숨 쉬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북학의 내편 ‘성(城)’의 주해 8에는 이희영이라는 사람이 “우리나라의 성은 모두 그림 속에 있는 성일 뿐이다”며 조선 시기에 지은 성의 허술함을 꼬집은 대목이 나온다. 안 교수는 이 책에서 “삼한본에는 이희영이 아니라 이주민(李朱民)이라는 이름으로 나오고, 자연본, 장서각본, 연경본, 금서본 등에는 이길대(李吉大)로 돼 있다”며 “이는 이희영이 18세기 천주교 신자·화가로서 신유박해 때 처형됐기 때문이다. 이를 숨기고자 이주민, 이길대로 쓴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박제가가 ‘지금도 구광화문(舊光化門)에는’이라고 묘사한 것과 관련해 안 교수는 단순히 옛 광화문이라는 뜻이 아니었다고 지적한다. 임진왜란 때 경복궁이 폐허가 된 뒤 궁성은 재건하지 않고 남쪽과 북쪽에 문 두 개만을 다시 세웠는데 그중 하나가 ‘구광화문(舊光化門)’이었다는 것을 밝혀냈다. 담백하고 직선적 글로 일관한 ‘북학의’는 요즘 기준으로 봐도 손색없는 인문교양서다.

예진수 기자 jinye@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