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고금평 기자의 컬처홀릭>이적, ‘방송의 적’ 아닌 ‘음악의 적’ 됐으면

케이블 음악전문 채널 엠넷에선 싱어송라이터 이적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이적쇼-방송의 적’이 한창입니다. 이 프로그램은 기존 예능처럼 재미를 좇지만, 형식과 내용은 ‘파격적’입니다. 19금 방송에서나 나올 법한 아슬아슬한 대화가 자연스럽게 터지고, 어느 정도 지켜야 할 인간관계의 최소한의 예의도 무시당하기 일쑤입니다.

이적이 함께 출연하는 가수 존박을 대놓고 무시하는 것은 기본이고, 어떤 상황에서도 과시의 흔적을 놓치지 않는 ‘자뻑’ 연출은 필수며, 중년에도 여전히 20대 젊은 여성에게 집적대는 본능의 욕구는 선택입니다. 이 모든 상황은 물론 연출된 것이긴 하지만, 방송에 집중하다보면 리얼과 연출의 경계가 애매할 때도 많습니다. 프로그램은 그 신선한 의도만큼 독특한 재미를 안겨줍니다. 고상한 싱어송라이터가 사실은 무척 이기적이고, 잘난 체에 익숙하며 작품과는 또 다른 속내의 허접함을 만끽할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주인공인 이적의 역할과 정체성이 애매하다는 것입니다. 그간 보여주지 않았던 그의 실상이 낱낱이 공개되며 희화화하는 것까지는 봐줄 만한데, 그래서 그에게서 ‘무엇’을 진짜 발견할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해선 여전히 물음표가 지워지지 않습니다. 프로그램이 좌충우돌로 진행되다보니, 결국 이적쇼가 존박쇼로 둔갑하는 ‘깜짝쇼’가 연출되기도 하고, 이적에게 가장 어울릴 것 같지 않는 유치한 애교 멘트가 남발되기도 합니다. 지난 24일 방송에서 뮤즈로 출연한 김완선 앞에서 보여준 이적의 무리수를 둔 억지 애교 멘트는 시청의 불편함이 최고조에 이른 장면 중 하나로 떠오를 법했습니다. (이 방송에서도 언급됐지만) 대형 기획사의 상품처럼 쏟아지는 아이돌 그룹 시장에서 아티스트의 존재력을 증명하기 위해 나섰다는 ‘그’의 의도가 점점 무색해지는 것은 아닌지 우려되기도 합니다.

싱어송라이터들이 예능에 잇따라 진출하는 대세적 흐름을 비난할 이유는 없습니다. 하지만 작품에서 보여준 멋있고 아름답고 훌륭한, 그 적당한 규격의 범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유희열은 자신의 장기인 ‘입담’으로 음악 프로그램을 이끌지만, 그 수위를 적절하게 조절함으로써 더 많은 호감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루시드폴이 유희열과의 인맥으로 이 프로그램에 고정 출연했다가 “나에게 맞지 않는 옷 같다”며 그만둔 상황은 아티스트의 ‘적정한 선’에 대한 일종의 경고 아닐까요.

이적은 좋은 집안과 학벌, 뛰어난 음악성에서 이미 ‘검증’된 뮤지션인데, 이 잘난 배경을 방송에서 재요리하듯 강조하거나 부족한 예능감을 ‘모험심’으로 극복하며 새로운 이미지 변신의 기회로 삼는 일이 그에게 도움이 될지는 여전히 미지수입니다. 그의 음악과 평행선을 달리는 새로운 프로그램에서 그를 만나볼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김고금평 기자 danny@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