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열자·온역?… 병명으로 읽는 근대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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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환 마마 천연두 / 신동원 지음 / 돌베개

질병의 명칭이나 개념의 변화를 통해 우리나라 근대성의 성격과 내용을 살피는 책. 1870년대부터 1920년까지 책과 사전, 신문, 소설, 질병분류표 등 여러 텍스트를 뒤져 시대와 문화의 차이에 따라 변화하는 질병의 개념을 살피고 있다. 한림대 한림과학원의 ‘일상개념총서’의 첫 번째 책으로 발간됐다. 한림대과학원은 한국의 근대를 연구하는 데는 정치, 사회적인 개념만으로는 한국근대 경험을 충분히 재현할 수 없다고 봤다. 그래서 주목한 게 ‘일상의 영역’이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병에 대한 사회구성원의 인식이 역사적 담론이자 사회문화적 구성물임을 밝혀낸다. 병의 이름에는 그 병에 대한 인식이 반영돼 있고, 병의 개념에는 역사적 지형과 시간적 변화, 그리고 식민지의 경험과 제국주의 침투 등이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예를 들어 ‘괴질(怪疾)’이란 병명에는 병에 대한 무지와 치료의 불가능성이 함의돼 있고, 이 병이 ‘호열자’로 불리게 되는 건 병인의 정체가 밝혀지고 이른바 ‘치병(治病)’의 가능성이 열렸음을 드러내는 것과 동시에 일본 제국주의의 침투를 보여준다.

저자가 들려주는 ‘호열자’란 병명의 유래는 이렇다. 일본에서는 콜레라를 음역해 ‘고레라’로 쓰고 한자로는 ‘호열랄(虎列剌)’이라고 표기했다. 이 용어가 국내로 들어와 한성순보 등의 신문에 소개됐는데 당시 열악한 인쇄기술 탓에 ‘랄(剌)’자가 독자들에게 ‘자(刺)’자로 읽혔다. 여간해서 구분하기 어려운 글자인 데다 조선인에게 ‘랄’보다는 사물을 지칭할 때 자주 쓰는 ‘자’가 더 익숙했으니 ‘호열자’가 됐다는 것이다.

전염병은 대개 본래 이름 말고 ‘역(疫)’이란 글자가 붙는 다른 이름도 있었다. 장티푸스는 ‘온역(溫疫)’, 이질은 ‘역리(疫痢)’, 콜레라는 ‘호역(虎疫)’으로 불리기도 했다. 역(疫)이란 과거에는 귀신이 관계하는 것이었고 돌림병은 귀신이 각처를 돌아다니며 옮기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갑오개혁 이후 전염병과 유행병은 비로소 공식명칭을 얻었다. 역신과 의학의 결투가 시작된 셈이었다.

책은 이런 과정에서 등장하는 새로운 개념과 용어를 상세하게 훑는다. ‘병의 개념을 통한 근대성의 발견’이라는 게 새롭고 낯선 주제임에도 저자는 도무지 거침이 없다. 고려와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가기도 하고, 중국 후한 때의 기록도 뒤진다. 질병이나 치료에 관련된 옛 문헌과 소설, 신문기사 등도 꼼꼼하게 찾아냈다. 신채효의 판소리 작품과 나도향의 소설에 등장하는 병에 대한 내용을 비교 분석하기도 한다.

저자는 이 같은 과정을 통해 19세기를 전후해 장티푸스와 콜레라, 천연두, 말라리아 등의 질병 명칭과 개념에 민간, 전통의학, 서양의학의 개념이 중층적으로 존재했으며 하나의 명칭이 우세를 점하는 이면에는 의학적 지식, 국가권력, 제국주의의 힘이 작동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이를 통해 근대의 서사를 읽어내고 있다.

박경일 기자 parking@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