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장은 달콤한 ‘자기기만’… 결과는 엄청난 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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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자신을 속이도록 진화했을까 / 로버트 트리버스 지음, 이한음 옮김 / 살림

“여성을 정말로 화나게 하는 것은 처음으로 성관계를 맺기 전에 남성이 자기 감정의 깊이를 속이고, 성관계를 가진 뒤에 남성이 전화도 안 하고 만나지도 않을 때다. (중략) 나는 사랑에 빠졌다고 느꼈고 두세 차례 섹스를 했다. 그러고 나면 끌렸던 감정이 통째로 사라졌다. 아니 사실상 피하려는 마음으로 돌아섰다. 낭만적인 사랑이라는 거짓 감정은 섹스를 유도하기 쉽도록 나타난 것이었으며 섹스가 끝난 뒤에는 사라진 것이 분명했다.”

살아 있는 최고의 진화생물학자로 평가받는 저자는 자신의 젊었을 때 경험을 이같이 솔직하게 털어놨다. 책은 기만과 자기기만이 어떻게 인류의 진화와 함께해 왔는지를 도발적으로 다룬다. 인간 개인의 문제에서부터 대형 사고에 이르기까지 생생한 사례를 소개하고 있다.

저자가 말하는 자기기만과 면역체계와의 관계가 흥미롭다. 자신의 성(性) 정체성을 숨기는 사람일수록 에이즈에 감염되기 쉬웠다는 것이다. 또한 기억력이나 상황 판단에 왜곡이 일어나는 현상이 비일비재하다. 학자들은 무려 94%가 자신의 실력이 상위 절반에 속한다고 확신한다. 미국 고등학생의 80%도 리더십 면에서 상위 절반에 속한다고 믿는다.

저자는 대한항공의 외부자문 사례와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일본의 기만 등도 소개하고 있다. 1993년 일본 정부는 마침내 위안소를 운영했음을 인정했지만 여전히 배상은 거부했다. 저자는 “그들은 역사 교육의 역할이 설령 거짓이라고 한들 일본인이 자긍심을 느낄 수 있는 역사를 가르치는 것”이라며 “자기 조상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긍정적인 것으로 교체하는 것”이라고 분석한다. 그는 거짓 역사를 가르친다는 것은 그저 새로운 수치심, 새로운 어두운 역사를 낳는 근원일 뿐이므로 속죄는 없고 도덕적 문제만 심화시킨다고 날카롭게 지적했다.

기만은 거짓 역사 서사를 구축하는 데 종종 활용된다. 사람들은 거짓 서사를 구축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한다. 하지만 거짓 역사 서사는 일단 만들어지면 집단 수준에서의 자기기만으로 작용하게 된다.

책에 따르면 1988∼1998년에 미국 항공사 등보다 사망 사고 비율이 크게 높았던 대한항공에 대해 외부 자문단이 실태를 파악했다. 자문단은 위계질서와 권위의식이 상대적으로 강한 사회인 한국이라 부조종사가 자기 주장을 단호하게 펼칠 자세가 돼 있지 않다고 결론을 내렸다. 자문단은 부조종사의 독립성과 주장을 강화하라고 했다. 심지어 영어를 더 공부할 것을 요구했다. 영어는 한국말로 할 때 쉽게 나오는 위계적 편향이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런 자문 이후 대한항공은 오점 없는 안전 기록을 내놨다는 것.

단순히 거짓말하는 차원을 넘어 왜곡된 상황을 사실이라고 스스로 믿는 게 살아가는 데 유리한 점이 많다. 기만이 발각되더라도 ‘나도 몰랐다’는 식의 자연스러운 반응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책은 조종사와 부조종사가 눈앞의 위험을 막연하게 회피하려다 발생한 1982년 에어플로리다 항공기 추락 사고를 비롯해 우주왕복선 챌린저호 참사 등을 들여다보고 있다.

1982년 1월 13일에 있었던 에어플로리다 항공 90편의 조종사와 부조종사의 이륙 전 대화내용이 그 예다. 사고의 위험을 감지한 부조종사가 조종사에게 우물쭈물 저항하지만 조종사의 현실회피적인 발언들에 막혀 스스로를 기만한다. 부조종사는 처음에 계기판의 속도가 잘못됐다고 지적했다. 조종사가 현실을 회피하자 “음, 정상일 수도 있겠네요”라고 합리화한다. 이륙 전에도 부조종사는 날개에 쌓인 눈과 질척거리는 활주로에 대해 위험을 지적하지만 조종사의 대수롭지 않다는 현실회피에 부딪치자 무기력해졌다. ‘설마 무슨 일이 있겠어’ 하는 안이함이 그의 머릿속을 지배한다. 이 같은 자기기만의 대가는 엄청나게도 승객 74명의 목숨이었다. 이와 비슷한 일들이 수많은 조직에서 벌어진다. 기업전략의 위험성을 인지했음에도 최고경영자(CEO)나 리더의 강력한 주장 앞에 괜찮을 거라 생각하고 막연하게 일을 추진하는 경우도 다반사다. 그 결과 위기가 촉발된다.

이처럼 자기기만은 초기에는 일련의 작은 편익들을 맛보게 하지만 결국 엄청난 피해를 초래한다. 자기기만의 혜택은 즉시 볼 수 있지만 그러한 무지의 비용을 나중에 치르는 것, 그게 삶의 일반법칙이라고 저자는 역설한다. 그래서 우리는 과신과 무의식을 피하려고 노력해야 하고, 쉽지는 않지만 자기기만에 빠질 위험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개인차원에서건 조직차원에서건 그 비용이 너무도 크기 때문이다.

저자는 “기억은 재구성되고 쉽게 조작된다”며 “사람들은 자신의 기억을 끊임없이 재창조하며, 다른 사람이 이 과정에 영향을 끼치는 것도 비교적 쉽다”고 말한다. “자기기만이 기분이 좋아지게 하기 위한 방어적인 것을 넘어 생존을 위한 공격적 본능의 일종인 ‘기만’에 봉사하도록 진화했다”는 생물학적인 답을 제시한다.

기만은 생명의 모든 수준에서 이뤄진다. 바이러스가 속임수를 쓰고, 세균, 식물, 곤충, 그 밖의 다양한 동물들이 기만행위를 한다는 뜻이다. 사회과학, 심리학, 생물학을 융합하는 기만에 대한 연구는 아직 걸음마 수준이다. 저자는 이렇게 묻는다. 자연선택은 자기기만을 선호해 왔으며, 남과 자신을 속이는 것이 낫다면 왜 우리는 자신의 그런 성향과 싸워야 하는가. 그의 답은 간단하다. 그대로 두고 볼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

저자는 “과신과 무의식을 피하려고 노력해야 하고, 쉽지는 않지만 자기기만에 빠질 위험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역설한다.

예진수 기자 jinye@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