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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게재 일자 : 2013년 10월 18일(金)
100년前 유럽, 그 순간들… ‘역사의 변곡점’
300여명‘시대의 인물’ 묘사 현장에 있는 듯 생생한 느낌 페이스북트위터밴드구글
1913년 세기의 여름 / 플로리안 일리스 지음, 한경희 옮김 / 문학동네

만약 바람과 물이 음악을 쓰고 그림을 그릴 수 있다면 벤저민 브리튼의 음악처럼 시원스러운 푸른색으로 바다 위를 달리는 곡조가 될 것이고, 화가 카를 슈미트로틀루푸의 ‘소나무 숲을 비추는 태양’처럼 해방감을 마음껏 느끼게 해주는 대형 누드화가 될 것이다.

현대음악 작곡가 브리튼이 태어난 바로 1913년, 화가 슈미트로틀루프는 대도시 베를린을 벗어나 사람이 거의 없는 바닷가로 간다.

그는 처음으로 거대한 누드화를 그렸다.

누드화에 대해 이같이 썼다.

“가슴에 다른 의미는 없다. 그것들은 에로틱한 순간이다. (중략)

나는 우주적인 찰나와 지상의 찰나 사이에 하나의 관계를 만들어내고 싶다.”

그가 찌든 도시에서 벗어난 기막힌 해방감과 우주적 윤리를 동시에 느낀 순간이다.

그 삶의 색채는 얼마나 화려했던가.

탈주의 생명력은 아름답기 이를 데 없다.


지금으로부터 꼭 100년 전인 1913년. 미술사가이자 문화사가인 저자는 켜켜이 쌓인 100년의 벽을 단숨에 뛰어넘어 그 시대의 한복판으로 뚜벅뚜벅 걸어간다. 이 책은 적어도 문화사에서 길었던 19세기가 끝나고 진정 새로운 세기, 즉 우리가 현재라고 부르는 시간이 시작된 해를 1913년이라고 상정한다. 문화사적 변곡점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것 같다.

그는 1913년 유럽 사회의 풍경을 1월부터 12월까지 월별로 나누어 그려 나간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한 해 전인 1913년. 빈의 8월 평균기온은 16도였다. 이런 이상기후 속에서 유럽은 ‘벨 에포크(아름다운 시대)’의 마지막 해를 보내고 있었다. 민족주의는 점점 확산되고, 발칸전쟁을 비롯한 영토 분쟁이 끊이지 않는 세계대전 전야였다. 이 같은 상황에서 문화예술적 변혁이 일어났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경제적 번영과 예술적 아우라(靈氣)가 마주쳐서 화려한 축포를 터뜨린 벨 에포크는 1890년부터 1913년까지의 기간이었다. 1913년 유럽 지성사에 빛나는 별들의 일상 세목을 촘촘하게 서술한 이 책을 보면서 이고리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이 파리 샹젤리제 극장에서 초연된 5월 29일이 어떻게 기록돼 있는지 궁금했다. “스트라빈스키가 예감했던 대로 13번 곡(처녀를 태양신에게 바치는 희생의 춤을 묘사한 곡)에서 소요가 일어난다. 무용수들은 무아지경에 빠져있고, 극장 경영자는 사태의 악화를 피하기 위해 한창 공연중에 불을 끈다.” 저자는 파리에서 인기 있는 모자가게를 운영하는 코코 샤넬이 이날 저녁 스트라빈스키를 처음 봤다는 것과 훗날 연인이 됐다는 우연성을 절묘하게 포착해낸다. 같은 해 무조(無調) 음악의 창시자 아르놀트 쇤베르크도 전위적인 음악회 덕분에 공개적으로 따귀를 얻어맞았다.

1913년 5월에 프랑스 문호 아나톨 프랑스는 “인생은 너무 짧고, 프루스트는 너무 길다”고 썼다. 1913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권이 출간됐을 때 쓴 표현이다. 프루스트조차 이 책이 7권까지 가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예언처럼 툭 던진 말이었다.

빈, 베를린, 파리, 모스크바 등 전 유럽을 망라한 300명이 넘는 인물에 대한 묘사가 생생하다. 마치 1913년에 현장에 있었던 기자나 작자가 직접 듣고 본 것을 가감없이 적어 내려간 것처럼 착각할 정도다. 상상의 세계에서나 그려보던 1913년이 너무 리얼해서 영적인 진동이 전해지는 듯하다. 이 책은 수많은 에피소드를 교직해 만든 훌륭한 문화사다. 잉카의 마추픽추 발굴은 당시 유럽인들에게 얼마나 충격적이었을까.

“‘내셔널 지오그래픽’ (1913년)4월호에서 인류는 처음으로 세계적 기적을 본다. (중략)탐험대장 하이럼 빙엄은 페루에서 가장 높은 곳에서 높은 초목들 사이로 불현듯 나타난 저 마법의 도시 폐허에서 최초로 사진을 찍었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은 4월호 전체를 이 발굴 소식에 바쳤다.” 그해 바빌론에서 에테메난키 사원이 발견됐다. 저 유명한 ‘바벨탑’이다.

프란츠 카프카, 라이너 마리아 릴케, 마르셀 프루스트, 제임스 조이스, 토마스 만, 지그문트 프로이트, 카를 구스타프 융, 파블로 피카소, 구스타프 클림트, 에곤 실레, 마르셀 뒤샹, 아르놀트 쇤베르크 등 현대 유럽 문화사의 주역들이 책 속에서 명멸한다.

장사익이 노래한 정성균의 시 ‘삼식이’는 이렇다. ‘소낙비는 내리구요/허리띠는 풀렸구요/업은 애기 보채구요/광우리는 이었구요.(후략)’ 여러 가지 상황이 한꺼번에 겹쳐져 당황하는 것은 이 시 속의 아낙네만이 아니다. 책에서도 이같이 전개가 되풀이된다. 1913년 2월 13일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는 도난당했다. 이 그림이 빠진 채 루브르 카탈로그가 나왔다. 그날 베를린에서 루돌프 슈타이너가 그의 위대한 강연 중 하나인 ‘새시대로 가는 전환점에서 레오나르도의 정신적 위대함’이라는 주제의 강연을 한다.

1913년은 미술 아카데미 입학을 거부당하고 싸구려 수채화를 그리며 생계를 이어가던 아돌프 히틀러와 한 집의 손님방에 틀어박혀 민족 문제를 연구하던 이오시프 스탈린이 빈의 쇤브룬 궁전 공원에서 산책하다 여러 번 마주쳤을지도 모르는 해다. 1913년 빈에서는 유고슬라비아를 정복하는 요십 브로즈 티토 역시 자동차 정비공으로 일했다. 20세기의 가장 지독한 폭군이자 독재자인 세 사람이 잠시 동안 함께 있었던 셈이다. 프란츠 카프카와 제임스 조이스와 로베르트 무질이 트리에스테의 한 카페에 잠시 나란히 앉아 커피를 마셨을지도 모를 일이다.

1913년은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문화적 성취들로 가득한 해였다. 문학에서는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 로베르트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와 함께 20세기 모더니즘 소설의 3대 고전으로 꼽히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탄생했다. 프라다 1호점이 문을 연 해도 1913년이다.

저자는 3년에 걸쳐 전기, 자서전, 편지, 일기, 사진, 신문 등 수많은 인물들의 방대한 관련 자료를 모으고 정리하고 재구성해 1913년 유럽의 한 해 풍경을 입체적 콜라주로 되살려냈다.

예진수 기자 jinye@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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