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실건물·인구 밀집이 태풍 피해 더 키웠다

관측 사상 최강의 ‘슈퍼태풍’ 하이옌(海燕·바다제비)으로 1만2000명 이상이 사망하고 피해액이 140억 달러(약 15조 원)에 달하는 등의 천문학적 피해가 발생한 것은 천재라기보다는 인재(人災)의 측면이 더 크다는 분석이 제기됐다.

사상 최악의 강력한 바람과 폭풍해일 등을 동반한 만큼 피해는 불가피했지만, 절대적인 빈곤에서 비롯된 부실한 건물과 과도한 인구밀집, 지구온난화 등으로 인해 피해 규모가 엄청나게 커졌다는 점에서 인재라는 것이다.

BBC 등 외신들은 12일 필리핀이 국가 재난사태를 선포하고 각국에서 지원이 이어지고 있지만 곳곳에 끊어진 도로와 단절된 통신 등 열악한 상황 때문에 구호품들이 제대로 전달되고 있지 않으며 현장은 여전히 혼란 그 자체라고 전했다.

미국 마이애미대에서 허리케인을 연구하는 브라이언 맥놀디는 AP통신에 “이번 재앙의 75∼80%는 자연보다는 인간의 책임”이라고 지적했다. 워싱턴포스트의 외교부문 블로거인 막스 피셔는 “매년 20여 개의 사이클론이 필리핀을 지나가지만 하이옌은 너무 막강했다”며 “어떤 나라도 이 정도 규모의 태풍에 피해를 완전히 막지는 못하겠지만 필리핀의 잘못된 대처가 그 피해를 키웠다”고 지적했다.

필리핀은 주목받는 신흥국 중 하나지만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콩고보다 한 단계 위인 165위에 머물고 있다. 이 같은 빈곤은 나무로 허술하게 지은 가옥과 열악한 인프라라는 결과로 나타났다. 실제로 정부가 수십만 명을 대피시켰으나 이들이 대피소로 삼았던 교회나 학교, 공공건물들도 거의 무너져내려 대피소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고 BBC는 지적했다. 피셔는 “중앙의 통제력이 약한 정치 시스템이 재난에 대한 체계적인 대응을 어렵게 했다”고 분석했다. 100개가 넘는 언어에 7000개가 넘는 섬, 공인 언어만도 8가지가 넘는 탓에 지방정부의 힘이 강한 정치적 특징은 인프라 건설이나 대형 재난 대응에는 장애가 된다는 지적이다. 열악한 치안으로 재난 현장에서는 상점과 구호물자 약탈행위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정부에 대한 불신 역시 피해를 키웠다. 대부분의 시민들은 집에 있지 말고 대피하라는 정부의 말을 제대로 따르지 않았다. 이는 건물에 대한 내진설계 등 각종 인프라 건설, 어릴 때부터 지진 대비 교육과 사회적인 질서 확립 등으로 지난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당시 지진과 쓰나미의 규모에 비해 상대적으로 피해와 혼란이 적었던 일본과 대비된다.

박세영 기자 go@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