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의수의 마흔 이후 남자의 생존법>더 이상 과거를 말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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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적에’라는 옛날이야기를 듣고 성장한 세대다. 부모님께서 어린 우리 형제들을 모아 놓고 해주셨던 옛날이야기는 참 재미있었다. 그런데 지금 기억나는 이야기가 없다. 당시에는 집에 텔레비전도 휴대전화도 없었다. 저녁을 먹고 난 뒤 호롱불 주변에 모여 책을 보거나 숙제를 하거나 뜨개질을 하고 난 뒤에 오후 10시가 되기 전에 모두 함께 잠들었다.

뒤돌아보면 이렇게 배시시 웃음짓게 만들어 주는 행복한 추억들이 있다. 과거에 대한 기억들을 떠올리면서 한 가지 발견한 사실은 내가 기억하고 싶은 순간들만 기억하고 있고 나머지 기억들은 전혀 생각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잘 알려진 기억에 대한 연구가 있다. 1962년 미국 정신과 레지던트인 대니얼 오퍼와 그의 동료들은 14세 소년 73명을 모집해 이들을 대상으로 부모에 대한 느낌, 부모의 훈육 방법, 가정 환경, 성 정체성 등에 대해 심도 있는 인터뷰를 했다.

34년 뒤 인터뷰 대상자들이 48세가 됐을 때, 오퍼는 그들을 다시 모아 10대 시절을 기억해 보라고 했다. 그 결과는 매우 놀라웠는데, 34년 전에 기록한 것과 일치되는 내용이 거의 없었다. 대여섯 살 때도 아닌 10대의 일인데도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것이 거의 없었고 ‘찍어서’ 대답하는 수준이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자신이 회상한 내용을 ‘실제 있었던 일’이라고 굳게 확신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자신의 10대가 외향적이었다고 회상한 사람은 대부분 14세 때에는 수줍고 내성적이라고 대답했다. 또 부모와 사이가 매우 좋았다고 기억하는 사람도 10대에는 부모와 갈등이 많다고 대답했다. 사실이 아니라 그렇게 기억하고 싶었던 것을 사실처럼 말하고 있었다.

인생의 전환기에 새로운 출발을 위해 해야 할 일이 과거로부터 탈출이다. 퇴직 이후 남자들은 과거의 포로가 돼 있을 때가 많다. 지나온 인생을 뒤돌아보면서 나의 과거가 초라하지 않았고 성공으로 가득 차 있으며, 아름다운 추억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퇴직 이후 마주하는 고달픈 현실 속에서 직면하게 되는 여러 문제들과 인간관계 갈등을 더 힘들어 한다. 내가 옛날에는 이랬는데 지금 내가 왜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지, 사람들이 나를 이렇게 함부로 취급하는 것을 견딜 수 없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정체성이라고 여기고 싶은 기억들만 편집해서 붙들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집단에서도 나타난다. 새로운 리더가 왔을 때 과거의 리더를 기준으로 현재의 리더를 부정하고 거부하는 경우들이 종종 있다. 이전 리더는 그렇지 않았는데 지금 리더는 이런 식으로 하기 때문에 틀렸다고 말한다. 이전 리더는 완전한 리더였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인격적으로도 문제가 있었고 실수도 많았다.

그런데 새로운 리더로 바뀌면서 이전 리더에 대한 그리움이 이전 리더의 연약함과 실수에 대한 기억들은 사라지고 가장 좋은 리더의 모습만 기억하기로 한 것이다. ‘기억의 조작’이다. 자기 식으로 세상을 해석하고 받아들이고 자신이 세상을 바라보는 자기 관점에만 집중하는 것을 ‘개인의 우화(personal fable)’라고 말한다.

현재에 살고 있는 자신을 스스로 과거의 포로가 되도록 만드는 것이다. 과거에 대한 자신의 편견을 포기해야 한다. 나이 들어서는 내가 기억하고 싶었던 과거의 사건만큼이나 내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사건들을 담담하게 살펴보며 정리하는 일이 필요하다. 과거로부터 떠나 자유로울 때 새로운 미래를 전망할 수 있고, 과거로부터 자유로워질 때 내게 일어나는 변화를 즐겁게 수용할 수 있다.

leeyuesu@kore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