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자료통해 고증… 균형잡힌 역사의식 돋보여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창비 제공

‘청소년 역사소설’의 새로운 지평을 연 장편소설이 나와 눈길을 끌고 있다. 최근 출간된 김소연(42) 작가의 장편 ‘야만의 거리’(창비)다. 소설의 재미와 긴장감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청소년들이 균형 잡힌 역사의식을 세울 수 있도록 사료(史料)에 충실한 작품이다. 제11회 창비 ‘좋은 어린이책’ 창작부문 대상작인 ‘명혜’를 비롯, ‘꽃신’ ‘남사당 조막이’ 등 깊이 있는 역사 동화를 선보여온 김 작가가 처음으로 발표한 청소년 소설이기도 하다.

소설은 일제강점기를 시대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 신분제가 폐지된 지 20여 년이 흘렀지만 구시대의 관습대로 살아가는 평안북도 구성. 주인공 동천은 양반 아버지와 몸종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어디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가 답답하기만 하다. 그러던 어느 해 봄, 산골 마을에도 뒤늦게 단발령이 강제로 시행되고 서당 대신 소학교가 들어선다. 소학교의 일본인 선생 다케다는 동천에게 더 큰 꿈을 꾸라며 용기를 북돋운다. 그 격려에 힘입어 동천은 바다 건너 일본으로 향한다.

일본에서 동천은 새로운 문물과 빛나는 미래, 무엇보다 신분의 굴레에 얽매이지 않은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찾기를 꿈꾼다. 그러나 동천이 맞닥뜨린 현실은 전혀 다르다. 어딘지 모르게 비밀스러운 헌책방 사장 구마모토, 비범한 기운의 독립운동가 박열, 천지를 뒤흔든 관동 대지진과 조선인 학살 등 문명의 탈을 쓴 야만의 거리에서 동천은 좌충우돌하며 성장해 간다.

소설의 가장 큰 장점은 일제강점기하 조선인뿐 아니라 일본인도 주요 인물로 등장하며 그 관계를 일방적으로 규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동천에게 흔쾌히 뱃삯을 빌려주고 말벗이 되는 염색쟁이 아베, 남다른 시대의식으로 일제의 만행에 대한 죄의식을 통감하는 오자키, 애틋한 연모의 상대 요시코, 동천의 목숨을 구하고 후견인이 되어 주는 구마모토 등이 조연으로 활약한다. 물론 동천은 조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일본에서 갖은 모욕과 착취를 당한다. 그러나 동천은 인간에 대한 증오를 키우는 대신 ‘선한’ 일본인과의 만남을 통해 “(누군가를) 믿을 수 있고 없고는 국적을 떠나서 그 사람 하기에 달린 것 아닌가” 하는 깨달음을 얻는다. 엄혹한 시절을 다루면서도 인간에 대한 보편적 믿음과 희망을 놓지 않는 작가의식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작가가 자료 등을 통해 철저히 고증·재현한 당대의 사회·문화상도 볼 만하다. 시골 마을의 단발 장면이나 일제강점기 달라진 평양 시내 등 한반도의 풍경은 물론이고 1920년대 일본 현지에 대한 묘사도 뛰어나다. 오사카(大阪)의 화려한 가로등과 꽃전등, 섬나라의 기후, 도쿄(東京) 뒷골목의 중고서점가 등이 섬세한 묘사를 통해 복원된다. 아울러 조선인 노무자의 고된 일상과 유학생 간의 사상 논쟁 등 일본 내 조선인의 당시 상황을 짐작할 수 있는 장면들도 생생하기 그지없다.

김 작가는 “일제강점기는 동화와 소설을 쓰는 내게 커다란 화두”라며 “아프고 슬픈 36년이지만 분명 그 안에는 설움과 가혹함만이 전부가 아닌, 또 다른 삶이 존재했다”고 밝혔다. 소설 ‘야만의 거리’의 2부 ‘승냥이’(가제)는 올해 말이나 내년 초쯤 출간될 예정이다.

김영번 기자 zerokim@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