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마저 오염시키는 ‘탐욕’ 가족갈등 통해 신랄한 고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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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욕의 시대’에 고결한 가치는 유지할 수 없는 것일까. 가족과 종교, 심지어 사랑마저도 무화(無化)시키는 탐욕을 고발하는 연극이 무대에 올랐다. 지난 7일부터 3월 2일까지 서울 종로구 대학로 동숭아트센터 소극장에서 공연하는 연극 ‘은밀한 기쁨’(사진)이다. 영국 극작가 데이비드 헤어 작(作)의 ‘은밀한 기쁨’은 한 가족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매우 시사적인 작품이기도 하다.

연극의 주요 등장인물은 모두 다섯 명. 아버지의 임종을 지킨 딸 이사벨은 장례식도 조용히 치르기를 바란다. 뒤늦게 장례식장을 찾은 언니 마리온은 환경부 차관으로 지극히 타산적인 인물. 마리온의 남편인 톰은 성공한 기업가로, 독실한 크리스천임을 항상 떠벌린다. 아버지의 새 아내인 캐서린은 여급 출신으로, 젊은 나이에 이미 알코올 중독자다. 언니 마리온 부부는 ‘처치 곤란한’ 캐서린을 이사벨에게 떠넘기려 한다.

한편 이사벨은 애인인 어윈과 함께 조그만 기획사를 운영하며 나름대로 자족하며 살고 있다. 하지만 캐서린의 간청과 언니 부부의 강권에 떠밀려 캐서린을 회사 직원으로 받아들인다. 그로 인해 어윈과 갈등을 빚지만 끊임없이 문제를 일으키는 캐서린을 이사벨은 내팽개치지 못한다.

언니 부부는 이사벨에게 사업을 확장해야 한다며 자신들이 투자를 하겠다고 나선다. 이사벨은 이를 거부하지만, 월급을 두 배로 올려주겠다는 꾐에 빠져 어윈이 투자를 받아들인다. 그러나 언니 부부의 투자는 실제론 세금 포탈을 노린 것임이 뒤늦게 드러난다.

연극은 이사벨을 둘러싼 인물들이 그녀를 어떻게 이용하고, 끝내는 죽음으로 몰고 가는지를 보여준다. 경제 논리와 정치적 야심, 이기적인 종교 논리는 물론이고 심지어 남녀 간의 사랑마저도 탐욕에 오염돼 있다. 이에 대항하는 이사벨은 죽은 아버지의 유지(遺志)를 살리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그로 인해 자멸의 길로 들어서는 것이다.

연극에서 언니 마리온 부부와 계모 캐서린, 이사벨의 애인인 어윈의 캐릭터는 매우 분명하게 드러난다. 냉철한 듯 보이는 마리온과 선량한 크리스천임을 내세우는 남편 톰은 결국 자신들의 이익만을 챙긴다. 대책 없는 푼수인 듯 보이는 캐서린 역시 자신의 욕심에만 급급하다. 심지어 사랑에 눈이 먼 듯 보이는 어윈도 지극히 자기 위주인 인물에 불과하다. 이사벨을 둘러싼 이들은 한마디로 탐욕에 휘둘리는 인간들인 것이다.

이들과 대립하며 스스로의 가치관을 지키려는 이사벨은 매우 중층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어떤 땐 원칙에 확고하다가도 언니 부부의 투자를 받아들이고, 계속 사고를 치는 캐서린을 감싸는 등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이 같은 이사벨의 복합적인 모습은 극 중 캐릭터를 확고하게 세우는 데 걸림돌로 작용한다. 탐욕에 찌든 인간들의 모습을 생생히 보여주기 위해 그 모든 탐욕에 대립되는 인물을 설정한 작가의 의도는 알겠지만, 구체적 인물로 형상화하는 데는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해외에서 이 연극에 대한 찬사와 함께 혹평도 뒤따랐다는 사실은 이와 연관된 것이리라. 김광보 연출, 추상미·이명행·유연수·우현주·서정연·조한나 출연. 1544-1555

김영번 기자 zerokim@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