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국가 情報요원 노출, 利敵행위다

김종호/논설위원

“이름이 드러남으로써 나는 고도의 훈련을 받은 임무를 더 이상 수행할 수 없게 됐다. 국가를 위해 20년 동안 임무에 충실했던 나의 신분을 정부가 보호하지 못한다면, 앞으로 누가 중앙정보국(CIA)에서 일하겠는가.” 미국 최고의 정보(情報)기관인 CIA의 여성 비밀 요원(要員) 출신 발레리 플레임이 2007년 3월 16일 하원 청문회에 불려나가 증언한 내용의 한 대목이다. 그녀는 이렇게 덧붙이기도 했다. “나는 국가를 사랑했기 때문에 내 임무도 사랑했다. 정보활동은 과학보다 예술에 가까운 것이다.”

플레임은 2003년의 ‘리크 게이트(leak gate)’ 희생양이었고, 당시 부통령의 비서실장이 그녀의 신분을 누설한 장본인으로 밝혀져 중형을 선고받았지만, 그녀의 정보요원관(觀)은 지금도 자주 회자된다. 그녀의 회고록 ‘공정한 게임(Fair Game)-스파이로서의 나의 인생, 백악관의 배신’을 미국의 더그 라이먼 감독이 2010년 영화화한 ‘페어 게임’을 많은 사람이 기억하는 것도 그래서다. 국가 정보기관 요원의 신분에 대한 비밀 유지가 중요하다는 것을 실증해주는 예는 이밖에도 많다. 이에 앞서 CIA 아테네 거점장(據點長) 리처드 웰치가 1975년에 암살당한 일도 그중에 하나다. CIA 퇴직자인 필립 에이지가 잡지 ‘카운터 스파이’를 통해 그의 신원을 공개한 결과였다. 에이지는 그 후로도 CIA의 비밀 요원 다수의 신원을 공개해 CIA에 큰 타격을 가했다. 이 사건은 결국 1982년 ‘정보요원 신원보호법’ 제정으로도 이어졌다. 국가 정보기관 요원의 신원을 알게 된 사람이 이를 고의로 누설하면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5만 달러 이하의 벌금형에 처하도록 법제화한 것이다.

미국뿐 아니라 세계 각국이 정보기관 요원의 신분 노출을 엄격히 제한·금지하고 있는 이유는 그 노출이 당사자의 생명을 잃게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국가 안보를 비롯한 국익(國益)과도 직결되기 때문임은 물론이다. 정보전쟁이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어서, 비밀 요원 활약의 중요성과 함께 그들의 신분 노출을 막아야 할 필요성도 더 커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기도 하다. 대한민국의 최고 정보기관인 국가정보원도 예외일 수 없다. 세계에서 가장 호전적(好戰的)이면서 한반도 안전과 세계 평화를 위협하고 있는 북한 정권이 언제 어떤 도발을 할지 예측하기 어렵고, 간첩 활동을 포함한 직·간접적 도발이 제3국을 우회해 더 은밀하게 자행되기도 하는 상황이어서 더더욱 그렇다.

이런 현실에서 국가정보원의 요원 신분을 노출시키는 것은 정보전쟁에서의 패배를 자초하며 대한민국 안보를 위태롭게 하는 이적(利敵)행위다. 도박판에서 자신의 ‘패’를 상대방에게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과도 같다. 외교관 신분인 ‘화이트’든, 신분을 숨긴 ‘블랙’이든 정보요원은 익명성이 철칙이다. 활동 지역의 정부에도 신원을 공개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 기본이다. 2007년 당시 김만복 국정원장이 아프가니스탄에서 납치된 한국인 인질들의 석방에 기여하고도 어이없다는 비판을 자초한 이유 또한 그 기본에 정면으로 역행했기 때문이다. 그는 범인들과 직접 접촉한 국정원 요원에게 선글라스를 쓰게 해 자신과 나란히 앉거나 서서 찍은 사진들을 무분별하게 공개했을 뿐 아니라 여러 차례의 기자회견에도 해당 요원을 동석시켰다. 그런 행태로 ‘선글라스 맨’이라는 유행어까지 확산시키면서 국정원 역사에 큰 오점(汚點)을 남긴 것이다.

그런데도 국회의원들까지 나서서 국정원 요원의 실명(實名)과 활동 내용을 함부로 까발리고 있는 것이 작금의 대한민국 현실이다. 심지어 민주당 의원 일부는 중국 선양 주재 총영사관까지 찾아가 국정원 요원을 윽박지르기도 하지 않았는가. 더욱이 그 영사는 민주당 등의 주장과 달리, 위조 논란에 휩싸인 간첩 혐의 피의자 관련 서류를 중국 공안 당국으로부터 입수한 인사도 아니라고 한다. 그러잖아도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국정원의 대북 휴민트(HUMINT) 정보망(網)이 붕괴되다시피 했다고 알려져 있는 상황이다. 국가 정보요원의 신분을 무분별하게 노출시키는 황당한 행태의 횡행은 이석기류(類)의 반(反)대한민국 세력이 더 마음대로 서식할 수 있는 풍토를 조성해줄 뿐이다. 그러고도 국가 안보가 확고히 다져지길 기대할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