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이젠 노동 아닌 신용을 착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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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려온 시간을 살아가기 / 지그문트 바우만돚시트랄리 로비로사 마드라조 지음, 조형준 옮김 /새물결

지난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를 계기로 이른바 ‘신용까지 저당잡히는’ 현대사회의 다양한 문제를 경제뿐만 아니라 정치·사회 등으로 확장해가며 거시적으로 분석한 책이다.

세계적인 석학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히는 폴란드 출신의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 그가 미국발 금융위기가 전 지구적인 공포 속에서 한창 진행 중이던 2009년 멕시코 출신의 여성 사회학자 시트랄리 로비로사 마드라조와 대담을 나눴고, 그 대담을 정리한 게 바로 이 책이다.

대담에서 다뤄지는 이야기들은 다양하다. 자본주의의 한계와 노동자들의 삶, 국가와 정치의 역할, 과학과 종교의 대립에 이르기까지 이야기가 넘나든다. 구순을 코 앞에 둔 노학자가 거침없이 쏟아내는 폭넓은 사유와 통찰, 그리고 지성이 자못 감탄스럽다.

성장과 팽창을 거듭해 온 세계 경제가 미국발 금융위기로 일거에 허물어지던 무렵, 불안과 공포는 전 지구를 휩쓸었다. 일순 모든 것이 불투명해졌고 사람들 사이에서는 국가의 역할과 자본주의의 미래 등에 대한 수많은 질문들이 제기됐다. 이 책을 펴내는 계기가 된 대담도 그 해답을 석학에게서 구하고자 기획된 것이었음이 분명하다.

대담에서 석학 바우만에게 쏟아진 질문은 이런 것들이다. 금융위기로 자본주의의 패러다임은 죽었는가. 경제적 지구화의 시대에 복지국가의 개념은 유효한가. 자본과 상품 교역의 지구화 속에서 ‘국가’의 개념은 다시 단단해질 수 있을까. 새로운 세대들은 과연 어떤 도전에 직면할 것인가….

이런 질문에 대해 바우만은 다양한 개념과 이야기들을 쏟아놓는다. 먼저 대출 부실에서 시작된 미국발 경제위기에서 촉발된 자본주의의 위기에 대한 바우만의 진단부터 살펴보자.

‘자본주의는 본질적으로 기생적인 체제일 수밖에 없다’는 게 바우만의 단언이다. 자본주의가 추구하는 끊임없는 성장과 지속적인 자본의 축적은 새로운 시장이 개척돼야 가능한 법. 자본주의 경제란 아무도 손대지 않은 처녀지가 있을 때 비로소 팽창하며 앞으로 나아간다. 실물의 시장에서 처녀지가 고갈되면서 ‘신용’이 그 대안으로 확장됐다.

자본주의의 착취 대상이 노동자의 착취에서 소비자의 신용으로 옮아갔고, 급기야 신용 자체를 상품으로 만들어 사고파는 처녀지를 만들어냈다. 그 과정에서 돌발적으로 발생한 미국발 경제위기는 자본주의 체제의 종말이 아니라 단순히 ‘최근의 처녀지가 고갈됐음’을 알리는 신호일 뿐이라는 게 바우만의 해석이다.

그렇다고 꿈꿀 수 있는 다른 체제가 있는 것도 아니다. 2차 세계대전 직후 정통 마르크스주의를 주장하는 공산주의자이기도 했던 그는 “공산주의야말로 예나 지금이나 노예제로 가는 지름길”이라고 단언한다.

그렇다면 사회주의는? 바우만은 사회주의가 가진 사회적 체계나 질서가 아니라 불평등과 불의, 억압, 차별, 그리고 인간 존엄성의 부정에 대한 고양된 감수성을 의미하는 ‘태도’에 대해서만 동의할 뿐이다.

책에서 돋보이는 건 지금까지 부분적으로만 시도됐던 다양한 관점과 개념을 다듬어서 포괄적인 맥락으로 접근하는 바우만의 거시적인 시선이다.

대담의 질문도, 또 그 질문을 받는 바우만의 답도 워낙 복잡한 플롯의 여러 가닥으로 꼬아져 있는 데다, 의미가 중첩된 복문의 문장과 단순 번역하는 것으로만 끝낸 책 뒤편 주(註)의 불친절함 탓에 이야기를 따라붙기가 쉽잖지만, 찬찬히 읽다보면 현대사회의 작동 원리부터 난마처럼 얽혀있는 난제의 ‘진짜 문제’를 큰 그림 속에서 들여다볼 수 있다. 지구력 있게 읽어낸다면 말이다.

이 책을 손에 잡게 된다면 오는 5월 11일까지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리는 한·중 미술전인 ‘액체문명전’을 찾아가보자. ‘액체문명전’은 바우만이 현대사회의 다양한 문제를 풀어가는 핵심 개념으로 들고 나왔던 이른바 ‘유동적 현대’를 바탕에 두고 기획된 전시다.

견고함을 지닌 과거의 체제가 고체였다면, 근대는 그 고체를 녹이면서 전 방위적으로 시작됐다는 게 이 개념의 출발이다. 액체화된 현대가 전통적인 윤리와 도덕, 인간적 유대, 저항의 정신마저 다 녹여버리고 말았다는 게 문제이긴 하지만, ‘유동적 현대’라는 관점에서의 접근이야말로 다원적 가치의 추구와 수평적인 관계를 만들 수 있으며, 현대사회의 복잡한 문제를 새로운 관점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게 바우만의 주장이다. 이런 주장은 이 책을 지탱하는 뼈대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액체문명전’ 전시회에선 액체처럼 스며드는 서구문명의 물결 속에서 흐트러진 중국인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작품들이 걸려 있다.

박경일 기자 parking@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