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문10답 뉴스 깊이보기>‘황제 노역’ 논란으로 본 환형유치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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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재호(72) 전 대주그룹 회장의 ‘황제 노역’이 알려지면서 후폭풍이 거세다. 일당 5억 원짜리 50일간의 노역으로 벌금 254억 원을 대신한다는 사실에 비판 여론이 비등했다. 대법원은 환형유치(換刑留置) 제도의 개선안 마련에 나섰고, 검찰은 노역을 중단시킨 채 숨긴 재산을 추적 중이다. 또 허 전 회장에게 ‘황제 노역’ 판결을 내린 판사가 광주 지역에서 오랫동안 재직한 지역법관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지역법관(향판·鄕判) 제도의 적정성도 도마 위에 올랐다. 허 전 회장이 재산을 처분해 벌금을 내겠다고 밝혔지만 성난 민심은 가라앉지 않고 있다. ‘황제 노역’을 가능하게 한 환형유치 제도를 둘러싼 논란과 개선 방안 등을 살펴본다.

1. 환형유치 제도란

환형유치 제도는 벌금 또는 과료를 내지 못하는 범죄자가 교도소에서 노역으로 대신하는 제도다. 형법 제69조(벌금과 과료)는 ‘벌금과 과료는 판결 확정일로부터 30일 내에 납입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단 벌금을 선고할 때에는 동시에 그 금액을 완납할 때까지 노역장에 유치할 것을 명할 수 있다. 벌금을 납입하지 않으면 1일 이상 3년 이하, 과료를 납입하지 않으면 1일 이상 30일 미만의 기간 노역장에 유치해 작업에 복무하게 한다. 즉 벌금이나 과료 판결을 받고서도 이를 낼 능력이 없는 범죄자를 벌하기 위한 제도인 것이다. 노역을 위해 교도소에 있을 때는 일반 수용자와 같은 대우를 받는다. 또 외국인 노역은 관례상 6개월을 넘기지 않는다.

2. 노역 일당은 어떻게 산정되나

문제는 벌금 금액과 상관없이 노역 기간이 3년을 넘을 수 없다는 점이다. 거액의 벌금을 선고받은 경우에도 최대 3년간 노역하면 벌금을 대신할 수 있다. 따라서 벌금 액수가 큰 경우, 유치기간 상한선(3년)을 지키기 위해서는 일당이 클 수밖에 없다. 일당에 대한 구체적 기준도 없다. 벌금을 탕감받는 노역 기간은 전적으로 판사가 재량에 따라 정한다. 이 때문에 벌금 1000만 원을 탕감받기 위해 3개월 동안 노역하는 경우도 있고, 허 전 회장처럼 50일간의 노역으로 254억 원의 벌금을 대신하는 판결이 나올 수도 있다. 판사의 재량이 가장 중요한 셈이다.

3. 역대 최고, 최저 일당은

허 전 회장에 선고된 노역 일당 5억 원은 역대 최고액이다. 과거 최고액은 권혁 시도상선 회장의 3억 원이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1억1000만 원 수준이었다. 경제 규모가 커지고 물가도 많이 오르면서 노역 일당 선고액도 계속 오르고 있다.

현재 선고되는 사건에서 최저 노역 일당 금액은 5만 원이다. 법원은 최근 노역 일당 최저 금액을 10만 원으로 인상할 방침을 세워놓은 상태다. 법원은 재판마다 차이가 생기지 않도록 물가 및 임금수준 등을 고려해 적당한 최저 노역 일당 수준을 정한다. 환형유치 제도는 1953년 형법이 제정될 때부터 있었기 때문에 최저 일당이 수백원 수준이었던 시절도 있었다.

4. 벌금 낼 능력 있어도 노역 가능한가

소액 벌금형을 선고받은 사람의 경우 벌금을 내지 않고 노역을 선택하는 경우가 상당히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벌금 대신 노역장행을 택하는 사람도 상당히 늘어 최근에는 법원에서 선고되는 벌금 액수의 20% 정도는 노역으로 대체되고 있다.

검찰은 그러나 고액 벌금자의 경우 벌금을 고의적으로 납부하지 않고 노역을 선택하기 어렵다고 밝히고 있다. 정해진 기간까지 벌금을 납부하지 않을 경우 노역장 유치 전 유예기간을 두고 벌금형 집행 대상자의 각종 재산을 조사하기 때문이다. 고액 벌금자는 검찰의 조사가 철저한 편이기 때문에 재산을 은닉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5. 노역장은 어떤 곳…어떤 일 하나

환형유치 제도로 노역을 하는 범죄자들은 기본적으로 일반 수형자들과 같은 노역장에서 일한다. 전국적으로 50여 개 교정기관에 350여 노역장이 있고 봉제, 식품가공, 목공 등 다양한 작업이 진행된다. 대부분의 교정본부에서는 민간기업에 위탁해 작업을 하고, 약 25개 기관에서 직영작업으로 제품을 생산하는데 최근 문제가 된 허 전 회장이 유치됐던 광주교도소의 경우 목공품, 의류, 두부 등을 직접 생산한다. 부산교도소에서는 가루세제·멸치젓 등을, 의정부교도소에서는 닭고기와 쌀 등을 생산한다. 외부기업으로 출퇴근하며 생산에 참여하는 외부기업 통근작업도 있지만 환형유치 제도로 들어온 범죄자들은 대부분 교정시설 내에서 작업을 한다. 노역작업은 보통 오전 9시부터 오후 3∼4시까지 점심시간을 제외하고 하루 5∼6시간씩 이뤄진다.

한편 환형유치 제도로 노역을 하는 범죄자들은 언제라도 벌금을 내면 출소할 수 있어 기술이 필요한 작업보다 쇼핑백 접기, 교정시설 청소, 취사장 지원 등 주로 단순한 작업을 한다. 겨울에는 추위를 피해 일부러 벌금형을 선고받고 노역장에 가는 경우도 있다. 교정본부 관계자는 “겨울에는 노숙자들이 겨울을 나기 위해 일부러 벌금형을 받고 들어오기도 하는데, 이들은 건강상태가 좋지 않아 구치소 바닥에 앉아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6. 국민 공분 일으킨 ‘일당 5억’

광주지검은 2007년 11월 허 전 회장을 508억 원 탈세, 100억 원 횡령 혐의로 기소한 뒤 1심 재판에서 징역 5년과 벌금 1016억 원을 구형했다. 검찰은 벌금형에 대해서는 이례적으로 선고유예를 요청했다. 광주지법은 2008년 12월 허 전 회장에게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벌금 508억 원을 선고했다. 이때 환형유치 금액은 ‘일당 2억5000만 원’이었다. 203일만 노역을 하면 508억 원을 내지 않아도 되는 조치였다.

검찰은 항소를 포기한 반면 허 전 회장은 판결에 불복해 항소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2010년 1월 징역 2년6월에 집행유예 4년, 벌금 254억 원을 선고했다. 징역형뿐 아니라 벌금도 절반으로 낮추고 노역 일당은 두 배(5억 원)로 올렸다. 이 때문에 노역 기간은 4분의 1가량인 50일로 대폭 줄게 됐다. 이 판결은 2011년 12월 대법원에서 확정됐다. 허 전 회장은 벌금을 내지 않고 해외로 도피했다가 지명수배됐고 지난 22일 귀국했다.

7. ‘황제 노역’ 취소하는 방법은

노역을 중단시키고 벌금을 환수하기 위해서는 노역장에 유치된 사람에 대해 형집행정지를 해야 한다. 형집행정지는 ‘건강, 고령, 출산, 보호해야 할 친족이 있는 때’ 등으로 사유가 한정돼 있다. 예외적으로 ‘기타 중대한 사유가 있는 때’를 두고 있다. 국민적 공분이 일자 검찰은 허 전 회장 사례가 예외 규정에 해당한다고 판단해 26일 형집행정지 결정을 내렸다. 노역 일당 때문에 형집행정지 결정이 내려진 첫 사례다.

허 전 회장은 앞으로 노역 대신 벌금을 갚아야 한다. 영장실질심사에 출두한 1일과 5일 노역장 유치 등으로 이미 30억 원을 탕감받아 224억 원을 갚아야 한다. 검찰은 환수를 위해 국세청 등 관련 당국과 협의해 허 전 회장의 국내외 재산 파악에 나서기로 했다. 앞서 국세청은 지난해 12월 체납 세금 징수를 위해 허 전 회장이 도피했던 뉴질랜드 현지 조사를 벌였고, 은닉 재산의 일부를 파악한 것으로 전해졌다.

8. 해외에서는

외국에도 환형유치 제도가 존재한다. 독일 등에서 시행 중인 ‘일수벌금제’가 유사한 경우다. 일수벌금제는 벌금 총액수를 정하기 전에 벌금을 내지 않을 경우 노역해야 할 기간을 먼저 정한다. 그 기간에 피고인이 실제 벌어들이는 일당 중 벌금으로 낼 수 있는 금액을 곱해 벌금 총액을 결정한다. 일단 벌금 총액을 먼저 정하고 노역일당을 정하는 우리나라의 ‘총액벌금제’와 순서가 반대다. 일수벌금제 방식을 따르게 되면 벌금과 노역의 총액이 비슷한 수준으로 결정된다. 핀란드가 1921년에 가장 먼저 시행했고 프랑스, 스페인, 스위스, 오스트리아 등 유럽 국가들이 주로 시행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1985년에서 1992년에 걸친 형법 개정 과정에서 일수벌금제 도입을 검토했지만 금융실명제 등이 실시되지 않아 정확한 재산을 파악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무산됐다.

9. 제도 개선 노력

논란이 일자 대법원은 환형유치 제도 개선에 착수했다. 범죄 유형이나 벌금 액수에 따라 최소 며칠 이상을 노역장에 유치하도록 하한기준을 설정하는 방안 등을 마련해 4월 초 발표할 예정이다. 판결서 주문에 노역장 유치기간을 특정해 작성하는 방안도 고려되고 있다. 벌금을 1일 노역장 유치 금액으로 환산하는 현 방식보다 판사에게 심리적 압박을 주기 때문에 과다한 ‘노역 일당’이 나오는 결과를 막는 효과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박민식 새누리당 의원은 50억 원 이상 고액 벌금을 선고받은 피고인이 벌금을 내지 못해 노역장에 처해질 경우 하루 일당이 벌금액의 1000분의 1을 넘지 못하도록 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형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하기로 했다. 박 의원은 “고액 벌금 미납자를 대상으로 한다는 점을 명확히 하고, 1000일 이상 노역장 유치가 되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설명했다.

10. 유탄 맞은 향판제

‘황제 노역’이 발생한 배경에는 향판 제도가 존재한다. 석연찮은 이번 판결의 이면에도 지역 인사와 유착된 향판의 영향력이 있었다는 의구심이 제기됐다. 실제 허 전 회장의 판결과 관련된 인물들은 대부분 향판들이다. 항소심을 선고한 현 장병우 광주지법원장은 29년간 광주, 전남 지역에서만 법관을 지냈다. 허 전 회장의 변호는 모두 향판 출신 전관 변호사들이 맡았다. 허 전 회장의 부친도 37년간 이 지역의 판사로 근무했고, 허 전 회장의 사위 역시 2006년 판사 생활을 시작해 줄곧 광주 지역에서 근무해 왔다.

향판 제도는 판사들의 순환보직이 업무의 연속성, 전문성을 떨어뜨린다는 지적이 제기돼 지난 2004년 도입됐다. 향판은 지역 사정에 밝기 때문에 판결의 신뢰도를 높였다는 긍정적 평가도 있지만 지역 인사와의 유착설은 끊임없이 문제점으로 제기돼 왔다.

‘향검(鄕檢)’의 솜방망이 처벌 요구도 도마 위에 올랐다. 1심에서 벌금의 선고유예를 요청한 A 검사는 전남 순천 출신, 항소심에서 형량이 크게 줄었지만 상고를 포기한 B 검사는 광주 출신이었다.

김동하·김대종 기자 haasskim@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