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로 읽는 책- 결핍>돈·情·시간 부족하다고? 집착 할수록 ‘덫’에 빠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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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핍의 경제학 / 센딜 멀레이너선·엘다 샤퍼 지음, 이경식 옮김 / RHK

‘피로사회’와 ‘투명사회’의 저자인 철학자 한병철은 “시대마다 그 시대의 고유한 질병이 있다”고 했다. 그는 우리시대 고유 질병을 우울증이라고 했지만 ‘결핍증’ 또한 이 시대 질병으로 꼽을 만하다. 가계부채 1조 원 시대에 전 국민이 돈에 쫓기고, 시간은 턱없이 부족하고, 초등학교에 가면 한 반에 몇 명 정도는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증후군(ADHD) 증상을 보인다. 신조어 무연사회(無緣社會)는 관계 결핍의 결과이고, 유대의 결핍이 낳은 애정 결핍은 감정노동을 이 시대 가장 핫한 직종으로 만들었다. 겉으론 풍요롭고 화려한 모든 것이 과잉인 시대, 변화의 속도마저 적정 수준을 넘은 속도과잉의 시대에 사람들은 절대적·상대적 결핍에 거의 탈진할 지경이다. 당신은 어떤지.

‘결핍’이 피로와 불행을 대량생산하는 시대에 멀레이너선 하버드대 경제학과 교수와 샤퍼 프린스턴대 심리학과 교수가 ‘결핍학’을 새로 만들고, 그 선언격으로 책을 내왔으니 어떻게 펼치지 않겠는가. 두 학자는 우리 시대의 결핍, 돈이든, 시간이든, 외로움이든 ‘자원이 필요한 것보다 적어서’ 벌어지는 결핍은 모두 같은 패턴으로 작동한다고 이야기한다.

이들이 파악한 ‘결핍의 메커니즘’은 자원부족-터널링-저글링-미봉책의 악순환으로 굴러간다. 사람들은 결핍상황에 빠지면 터널링(tunneling) 단계에 들어간다. 터널링이란 긴 터널 안에선 멀리 밝게 빛나는 출구만 보이고 주변은 보이지 않는 것을 빗대 만든 용어이다. 돈이 없는 사람은 돈만 생각하고, 배고픈 사람은 음식만 생각하는 식이다. 터널링의 긍정적 효과도 있다. 자원이 부족할수록 고도의 집중력이 발휘되는 것이다. 저자들은 이를 ‘집중배당금’으로 표현했다. 작가들이 데드라인에 임박해야 글을 잘 써지는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자연의 세계에서 보면 꿀벌이 말벌보다 더 정교한 집을 만드는 것도 이 ‘집중배당금’ 때문이다. 꿀벌이 집짓기 재료인 밀랍 1파운드(약 450g)를 얻기 위해서는 꿀 8파운드를 먹어야 하기에 밀랍을 쓰는 데에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집중배당금’은 편협한 관점 때문에 진짜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하게 한다. 결핍 터널링 속에선 긴급한 결핍 해결에 급급해 고금리 대출 같은 미봉책에 손을 내밀게 된다. 더 큰 문제는 일단 근시안적 ‘결핍의 덫’에 걸리면 한 가지 긴급한 일이 해결되는 듯하면 또 다른 긴급한 일로 움직여야 하는 저글링 상태에 빠진다는 점이다. 여러 개의 공 가운데 땅에 떨어지려는 공에만 초점을 맞추다 보니 단기 미봉책들로 뒤엉켜 상황이 더욱 엉망진창이 된다.

게다가 결핍은 사람을 멍청이로 만든다. 저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일수록 “인지 능력이 떨어진다”며 실제 지능이 낮아서가 아니라 결핍에 따른 걱정과 우려로 머리가 꽉 차 이성적 판단이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빚에 쪼들리는 사람일수록 대출약관을 잘못 읽어 낭패를 당하는 경우가 많다. 이 같은 악순환 패턴으로 인해 가난한 사람은 계속 가난하고, 외로운 사람은 계속 외롭고 바쁜 사람은 계속 바쁘다는 것이 책의 결론이다. 다소 허무하고 약간의 반감마저 불러일으키는데, 저자들은 가장 심각한 경제적 결핍인 가난까지도 과도하게 ‘개인’의 책임으로, 개인적 결핍패턴의 결과로 설명하기 때문이다. 사회적 완충지대에 대한 논의가 없어 맥이 빠지기도 한다. 하지만 두 저자는 “결핍이 어떻게 인간의 정신에 작용하는가를 이해하면 결핍의 덫을 피하거나, 최소한 유해성을 누그러뜨릴 가능성이 더 높아진다”고 말한다.

작동 메커니즘을 안다는 것은 객관적 눈을 갖게 되는 것이긴 하다. 지금 당신이 터널 안에서 저글링 중이라면 일단 멈추고 고개를 돌려 돌아보시길 바란다.

최현미 기자 chm@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