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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뉴스와 시각 게재 일자 : 2014년 04월 17일(木)
英國의 ‘치매와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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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애리/국제부 선임기자

브리스틀은 영국 잉글랜드 서부의 에이번 강에 딸린 항구 도시다. 선박과 철도가 연결되는 좋은 교통 입지 덕분에 오래전부터 무역항으로 발전했다. 브리스틀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흑인 노예무역이다. 기록에 따르면 1697년부터 1807년까지 약 50만 명의 아프리카 노예가 브리스틀 항구를 통해 들어와 영국과 유럽 곳곳으로 팔려나갔다고 한다. 지금은 영국은 물론 세계적으로도 손꼽히는 명문대인 브리스틀대의 젊은 학생들로 활기가 넘쳐나는 교육·문화도시가 됐다.

브리스틀이 유명한 또 한 가지 이유는 좀 특이하다. 바로, 영국에서 치매환자들이 가장 살기 좋은 도시란 사실이다. 일명 ‘치매 우호 도시(dementia friendly city)’다. 지난 10일 브리스틀대의 공공보건연구소인 ‘엘리자베스 블랙웰 연구소’를 방문해 제러미 타바레 소장으로부터 이 표현을 처음 들었을 때 신선한 충격이었다. 기업하기 좋은 도시, 놀기 좋은 도시, 심지어 연애하기 좋은 도시란 말은 들어봤어도 치매환자에게 좋은 도시란 말을 들어본 것은 생전 처음이었다.

브리스틀 시정부는 몇 해 전부터 쇼핑센터 등 시내 곳곳에 치매환자들을 위한 안내 표지판을 마련하는 등 다양한 서비스들을 제공하고 있다고 한다. 문제가 생긴 환자에게 즉각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시스템도 갖춰져 있다. 치매 관련 봉사단체 등도 매우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매년 5월 중하순에는 ‘치매주간’도 열린다. 시정부 사이트에 들어가보니 “치매 증세를 가지고 있는 사람도 독립적으로 생활할 수 있고 다른 사람과 어울려 살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목표”라고 소개돼 있었다. 브리스틀에는 치매 연구를 위해 아낌없이 지원하는 재단들도 있다. 그중 하나인 브레이스(BRACE)는 치매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지금처럼 높지 않았던 1987년에 설립돼 지금까지 약 1400만 파운드(약 243억 원)를 조성했다. 어찌보면 적은 액수일 수도 있지만, 지역 기업인들과 주민들이 오로지 치매 연구 하나만을 위해 다양한 행사들을 열어 이만큼의 돈을 모았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브리스틀대 연구팀이 현재 개발 중인 일명 ‘스마트 홈’ 역시 브레이스로부터 지원을 받고 있다. ‘스마트 홈’은 치매환자들이 낯선 시설에 들어가지 않고 자택에 그대로 살면서 가능한 한 독립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첨단기술로 돕는 프로젝트다.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는 2012년 ‘치매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고령화로 인해 치매환자가 늘어나면서 정부가 치매를 책임지고 나선 것이다. 무상 보건 서비스인 국가의료서비스(NHS)는 연간 230억 파운드를 치매 환자 치료 요양비로 사용하고 있다.

브리스틀을 돌아보고 느낀 것은 복지 선진국가 영국이 치매를 개인과 가족이 아닌, 사회와 국가 책임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영국을 복지망국병에 걸린 국가로 비판하는 시각도 있지만, 치매 정책만큼은 진정으로 부러웠다. 치매 부모를 자식이 살해하고, 한 가족이 파탄나는 비극이 일어나는 한국과 영국의 거리감이 아프도록 생생하게 가슴을 파고들었다.

브리스틀 = aeri@ 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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