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失敗의 자산’ 지워온 나라

20년 전 성수대교 붕괴는
‘하면 된다’는 질주본능이
남긴 어두운 이면

실패에서 교훈 얻지 못하고
모순 숨겨온 不敗신드롬이
또다시 진도의 비극으로

어린 학생들을 차디찬 바닷속에 두고도 사실상 손을 놓고 있던 지난 며칠 사이 누군가 “딴 나라에 와 있는 것 같다”고 했다. 21세기 대한민국의 성취에 더 익숙할, 20대 후반의 그에게 이런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낯설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차마 고개를 들 수 없는 어른들은 이미 한 세대 전에 유사한 경험을 했다.

꼭 20년 전인 1994년 10월 21일 아침 성수대교 상판이 거짓말처럼 뚝 끊기면서 주저앉았다. 희생자 32명 중 상당수는 버스 타고 학교 가던 무학여고생이었다. 다리 중간이 허망하게 잘려나간 장면, 물에 젖은 책가방은 국민의 뇌리에 트라우마처럼 남았다. 하지만 불과 6개월 뒤 학생 42명 등 101명의 목숨을 앗아간 대구 지하철 가스폭발, 다시 2개월 만에 502명의 희생자를 낸 삼풍백화점 붕괴 참사가 잇달아 터졌다. 더 이상 돌발적인 사고가 아니었다. 당시 건설 분야 취재를 맡아 기사를 처리하면서 ‘불패(不敗)신드롬’이란 표현을 쓴 기억이 난다.

불패신드롬은 ‘하면 된다’로 요약되는, 개발연대 성공신화의 어두운 이면이다. 1971년 개통된 경부고속도로는 그 영욕의 축소판이다. ‘한강의 기적’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이면서, 준공 첫날부터 보수공사를 하는 진기록도 세운다. 기술도, 돈도 없던 시절엔 예컨대 10㎝ 깊이로 쌓을 도로를 5㎝로 줄이면 두 배를 건설할 수 있다는 ‘경제 도로’ 개념이 통용됐다. 질(質)을 따질 겨를은 없었다. 웬만한 건 묵인해가면서 목표를 향해서만 질주한 귀결이 하드웨어의 부실이었고, 대가는 컸다.

그 후 20년, 대한민국은 최소한 부실의 공포에서는 벗어났다고 믿었다. 조선·철강·IT는 이미 세계 최고 수준이다. 삼성이 만든 스마트폰 출시일엔 나라마다 길게 줄을 서서 인증샷을 찍는다. 한류 문화에 자긍심을 가진 지도 오래다. 그렇듯 성공신화를 축적해온 나라에서 진도 참사는 도무지 설명이 되지 않는다. 침몰에 이른 과정부터 해운사의 조치, 정부의 초기 대응과 구조·수습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정상인 게 없다. ‘조난당한 것은 세월호가 아니라 대한민국 정부’라는 지적이 뼈아프다.

불패신드롬은 사라지지 않았다. 20년 전 하드웨어의 결함은 어느 정도 극복했다 해도 의식행태, 곧 소프트웨어와 휴먼웨어의 부실은 여전하다. 가라앉는 배 안에 어린 학생들을 놔둔 채 도망치는 선장과 선원을 우리 사회의 별종으로 치부해버리면 그만인가. 타인에 대한 배려가 실종된 사회의 한 단면은 아닌가. 분초를 다투는 재난 상황에 컨트롤타워를 꾸리는 데 1시간 가까이 허비하고, 구조대는 난파선 현장 언저리만 겉돌고, 심지어 탑승·구조자 집계마저 오락가락하는 정부는 어찌해야 하는가. 민·관 모두 제대로 된 매뉴얼이 없거나, 그런 걸 지키면 피곤할 뿐이라는 의식을 공유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큰 재해 전에 작은 재해가 29건, 그리고 사소한 재해가 300건이 존재한다는 ‘하인리히 법칙’이 전하는 메시지는 ‘어느날 갑자기’식의 우연한 재난은 결코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해운사의 형편없는 안전 관리와 정부 구난 시스템의 허점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벌써 수없이 경고등이 켜졌을 텐데도 때론 무심하게, 대개는 못 본 체하고 넘긴 결과, 대형 재난으로 이어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진도 참사는 인재(人災), 그것도 미필적 고의에 의한 공동범죄다.

사람에게 통증은 몸을 보호하려는 반응이다. 조직이 손상되거나 병에 걸렸을 때 몸에 경고를 보내 대처토록 하는 시스템이다. 그 통증을 무시하거나 응급처치로 대충 넘기면 위험한 결과로 이어지기 쉽다. 이른바 ‘실패학(失敗學)’도 개인이나 조직이 겪은 아픔을 재구성해 집단의 지혜를 얻자는 것이다. 대부분의 큰 실패는 작은 실패의 반복에서 나온다. 큰 성공 역시 실패를 냉철하게 복기(復棋)한 연후에 얻는다.

한국사회는 안타깝게도 20년 전의 실패와 통증에서 얻은 게 없다. 불패 신드롬이 득세하는 곳에서 실패는 드러내선 안되고, 또 지워져야 하는 존재다. 그 결과 실패의 교훈은 잊힌 채 ‘만성통증’으로 굳어졌다. 만성통증이 위험한 것은 그 자체가 하나의 병증이 돼 처방조차 어렵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이 새 성장동력을 찾지 못한 채 주춤거리는 근본 이유일지도 모른다.

김회평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