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Global Focus >신세키 장관 사임 부른 ‘美 보훈병원 스캔들’

71세의 해군 참전용사(베테랑) 토머스 브린은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지난 2013년 9월 28일 그는 피닉스 보훈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방광암 4기 환자인 그의 소변에서는 피가 흘렀다. 비뇨기과 전문의는 “1주일 안으로 입원 통보가 갈 것”이라고 말하고 브린을 돌려보냈다. 의료 차트에는 ‘긴급(urgent)’이라는 단어가 적혔다. 한 달, 두 달이 지나도 연락은 없었다. 브린은 그해 11월 30일 결국 숨을 거두었다. 장례식이 끝난 12월 6일 ‘진료 일정이 잡혔으니 내원해달라’는 연락이 왔다.

‘죽음의 대기’, ‘조국의 배신’…. 베테랑들을 최고로 예우하는 미국이 보훈병원 스캔들로 들끓고 있다. 4성 장군 출신인 에릭 신세키 보훈장관이 5월 30일 사임했고, 버락 오바마 대통령에게도 화살이 모아지고 있다. 한국도 현충일(6월 6일)을 공휴일로 정해 나라를 위해 헌신한 호국영령을 기리고 있지만, 미국에서 베테랑 예우에 관한 이슈는 엄청난 폭발력을 갖고 있다. 공화당은 오는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보훈병원 스캔들을 주요 쟁점으로 삼아 공격을 퍼붓고 있다. 무엇보다 이번 보훈병원 스캔들은 미국 역시 부정과 부패로 얼룩져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면서 군 복무 봉사를 최고의 영예로 여기는 미국민들의 자긍심에 상처를 냈다.

보훈병원 스캔들은 ‘휘슬 블로어(내부 고발자)’ 샘 푸트의 고발로 촉발됐다. 24년 경력의 은퇴한 피닉스 보훈병원 외과 전문의인 푸트는 지난 4월 23일 CNN과 인터뷰를 했다. 그는 인터뷰에서 “지난 수년 동안 애리조나주 피닉스 보훈병원에서는 40명의 베테랑들이 진료 순서를 기다리다가 사망했다”고 폭로했다. 브린 역시 기약 없는 진료 순서를 기다렸던 대기자 중의 한 명이었다.

푸트의 폭로는 묻혀있던 비리를 들춰냈고, 베테랑들은 분노하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정부의 의료서비스 혜택을 받는 베테랑들은 650만 명에 달한다.

피닉스 보훈병원은 두 개의 진료 대기 명단을 작성했다. 하나는 보훈부에 보고하는 공식 진료 대기 명단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실제 진료 대기 명단인 ‘비밀 리스트’였다. 베테랑들이 신청하면 14일 안에 진료를 받도록 하는 보훈부의 의무규정은 지켜지지 않았다. 지난 5월 28일 보훈부가 발표한 중간보고서에 따르면 피닉스 보훈병원이 정부에 보고한 평균 진료 대기 기간은 30일이었지만 실제로는 115일에 달했다. 제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베테랑들이 고령화되면서 진료 수요가 늘어나고,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전쟁 베테랑들이 돌아오면서 환자들이 넘쳐나자 피닉스 보훈병원은 진료 대기 기간을 허위로 조작했다. 1700여 명의 베테랑들이 고통 속에서 진료 통보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허위 보고는 피닉스 보훈병원으로 그치지 않았다. 전국 각지의 보훈병원 비리가 미국내 최대 베테랑 단체인 미국재향군인회(American Legion)로 쏟아졌다. 뉴멕시코주 앨버커키, 콜로라도주 포트콜린스, 텍사스주 오스틴과 샌안토니오, 일리노이주 시카고,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컬럼비아, 조지아주 애틀랜타 등 전국 각지 11개 지역 보훈병원에서 피닉스 보훈병원과 같은 조작 사례가 보고됐다. 재향군인회에 따르면 27만1740명의 베테랑들이 진료를 받기 위해 125일 이상 기다리고 있는 것으로 집계됐다. 신세키 전 보훈장관도 사임 전인 5월 26일 “나 자신은 물론, 정부 그리고 베테랑들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낀다”고 고백했다.

보훈병원 스캔들은 미국의 성과주의, 시스템 만능주의, 관료주의 사회가 만들어낸 부작용의 한 단면이다. 보훈부는 ‘빠른 진료, 신속한 치료’를 내걸고 진료 대기 기간을 단축시킨 보훈병원 직원들에게 보너스를 지급했다. 해임된 피닉스 보훈병원의 샤론 헬먼 헬스케어 전 국장은 2013년 16만9900달러(약 1억7392만 원)의 연봉 외에 9345달러를 성과급으로 챙겼다. 다른 직원들도 성과급을 받기 위해 비밀 리스트 작성에 동조했다. 보훈부 감독관들은 허위로 작성된 진료 대기 기간을 맹신했다. 2005년 이후 진료 대기 기간의 허위 작성 문제를 지적한 18건의 보고서가 상부에 제출됐지만 관료주의에 젖은 보훈부는 감독 시스템을 과신하면서 문제를 제대로 점검하지 않았다.

보훈병원 스캔들의 불길은 미국에서 점점 확산되고 있다. 최근 ‘성장을 위한 보수주의 클럽’은 오바마 행정부의 실정을 비판하는 정치 광고에 전국적으로 30만 달러를 집행했다. 베트남전 베테랑인 존 매케인(애리조나) 상원의원은 “베테랑들이 보훈병원이 아닌 다른 병원에서도 진료를 받도록 관련 규정을 개선해야 한다”고 밝혔다. 28만 명의 직원이 근무하는 보훈부의 예산은 지난해 480억 달러 정도에 달한다. 공화당의 재키 왈로르스키(인디애나) 하원의원은 “보훈병원 스캔들은 미국에서 관료주의가 미친 듯이 날뛰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말했다.

자유, 정의, 평등을 외치면서 민주주의 국가의 전형을 자처하던 미국 역시 여느 보통국가와 다를 바 없었다.

워싱턴 = 이제교 특파원 jklee@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