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란제리 브랜드 빅토리아시크릿의 ‘러브 마이 보디 캠페인’ 광고(위)와 비교되는 도브의 ‘리얼 뷰티 캠페인’ 광고. 아름다운 몸에 대한 강박적 기준에 도전장을 내미는 듯하다. 동녘 제공
젠더와 사회 / 한국여성연구소 엮음 / 동녘
영화 ‘건축학개론’에서 대학 새내기 승민(이제훈)은 선배 재욱(유연석)으로부터 ‘작업의 정석’을 배운다. 내용은 간단하다. “여자는 일단 술을 먹여서 취하게 만들어. 취하면 업어. 침대에 눕혀. 끝.”
재욱은 승민이 좋아하는 서연(배수지)을 이 정석으로 ‘낚는다’. 승민은 ‘끝’을 암시하는 장면을 목격하지만 제지하지 않는데, 분노·슬픔으로 가득찬 얼굴로 서연의 집 문을 두드리려다 돌아서고 만다. 그리고 승민과 서연의 사이는 정말로 끝.
나임윤경(문화학 협동과정) 연세대 교수는 “그녀(서연)의 의지에 반한 성폭력이 그(승민)에게조차 연애를 위한 ‘작업의 정석’ 첫 단계로 해석되었기 때문에, 그는 성폭력에 개입하지 않는다. 연애를 위한 작업으로서의 성폭력은 사적이고 낭만적인 것이라 여겼기 때문일 거다”고 분석한다.
이는 철저히 남성중심적 시각에 기초한 것이다. 서연은 성폭력 피해자가 아니라 그 남성의 구애를 받아들인 여성이 되고, 오랜 시간이 흐르도록 승민에게 ‘쌍년’으로 기억된다. 안타까운 건 대다수 영화 관객(특히 남성)이 승민에게 공감한다는 점. 한국 사회에서 (이성 간) 사랑과 친밀성이 상호 인정을 기반으로 한 평등과 여전히 동떨어져 있다는 뜻이다. ‘불편한 진실’이다.
400만 명 이상 관객을 동원한 영화에 대한 평가절하가 아니다. 한국 사회를 들여다보는 방법으로 ‘젠더(gender·사회적인 의미의 성)’를 제시한 것. 나임윤경 교수는 일상의 경험 중 하나인 연애를 ‘젠더’ 관점으로 읽어낸다. 그는 “남성중심성을 전제하는 등 많은 모순과 문제가 있음에도 (이성애) 연애는 현재 거의 모든 대학생들에게 일상, 스펙 혹은 프로젝트처럼 돼버렸다”며 “남성은 물론 여성에게도 관계에 대한 성찰적 질문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이 ‘성찰’을 위해 책은 나 교수를 포함, 15개의 시선을 모았다. 역사, 사회학, 문화학, 인류학, 미디어, 정책, 시민운동에 몸담고 있는 연구자 15명이 의기투합한 것. 이들의 ‘눈’은 한국 사회를 들여다보는 창(窓)이 된다.
‘Feminist Perspectives on Gender and Society(성과 사회를 보는 페미니스트의 시선)’라는 영어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창의 틀은 여성학과 페미니즘(여성에 대한 권리의 확장을 주장하는 주의)이다.
그러나 책은 “여성학이 오직 여성만을 위한다는 생각은 큰 오해다”며 ‘관계의 학문’이라는 여성학 본연의 의미를 살리려 노력했다. 남녀 모두를 위한 젠더 연구서를 표방했고, 젠더 체계의 이론적 배경뿐 아니라 걸그룹 신드롬, ‘88만 원 세대’의 연애, 사이버 마초와 루저의 등장 등 한국적 맥락을 고려해 일상을 분석한다.
김양선(기초교육) 한림대 교수는 사회 전반에 부는 몸 만들기 열풍을 꼬집고, ‘바람직한 몸’에 대한 사회적 기준도 젠더에 따라 달라진다고 말한다. “남성의 몸은 근육질, 여성의 몸은 스키니한 마른 몸에 가슴과 엉덩이를 강조한 S라인을 요구하면서 남성과 여성은 자신의 성별에 맞는 몸, 사회가 요구하는 이상적 기준의 몸을 만들기 위해 몸 가꾸기에 매진한다.”(285쪽)
신경아(사회학) 한림대 교수는 노동시장을 살핀다. 그는 최근 여성의 지위가 너무 높아져 남성들이 역차별을 당하기 때문에 군가산점 제도를 부활시키고, 여성가족부도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여성의 지위가 정말 향상된 것인지는 노동시장에서 찾아야 한다”며 “한국에서 여성의 고용률이 OECD 국가 중 가장 낮은 수준(53%)이며, 이러한 수치는 해방 직후인 1940∼1950년대와 비슷한 수준이다”고 지적한다.
또 김예란(미디어영상학) 광운대 교수는 걸그룹의 성상품화를 비난하며 “아이돌의 이미지는 ‘소녀’라는 브랜드에도 불구하고, 역설적이게도 매우 성숙하고 현저하게 관능적이다. 아이 같고 순수하며 순결한 속성을 지니는 소녀라는 이름과는 대비되게 한국의 걸 아이돌은 대부분 20대다”고 밝히고 있다.
무엇보다 이 책은 남성성에도 주목하는 게 특징이다. 왜 지금 한국 사회의 남성들이 ‘일베’와 같은 사이버 마초들의 공간에 모이는 것인지, ‘무한도전’ ‘남자의 자격’ ‘진짜 사나이’ ‘개그 콘서트’ 등 인기 예능에는 왜 유독 남성 출연자들이 단체로 등장해 ‘찌질함’을 보이는 건지, 현상의 이면을 살핀다.
엄기호(문화인류학) 연세대 강사는 “남자의 위기가 본격적으로 이야기되기 시작한 것은 바꾸어 말하면 남성들이 여성을 ‘경쟁자’로 인식하기 시작하면서부터다”며 “이런 패배감을 여성들에 대한 적대와 공격으로 전환한 것이 바로 사이버 마초들이다”고 설명한다. 말하자면, 지금은 지배적인 남성문화에 균열이 가고 새로운 ‘남성성’이 등장하는 때인 셈이다.
‘젠더와 사회’가 여성주의 역사 등 이론 차원에서부터 젠더 관점에서 본 일상, 복지국가와 시민사회운동 등 젠더를 넘어선 성평등까지 원론에서 한국적 맥락의 젠더를 총망라했다고 하면, ‘젠더, 만들어진 성’(코델리아 파인 지음·이지윤 옮김, 휴먼사이언스)은 ‘젠더와 사회’ 1부에서 하정옥 서울대 여성연구소 책임연구원이 고찰한 과학 (‘두 개의 성’과 성차에 대한 과학적 신념)적 측면을 보다 확장시킨 책이다.
저자는 “남자의 뇌와 여자의 뇌가 다르다는 것은 뇌학과 심리학이 만들어낸 새빨간 거짓말”이라며 21세기 과학이 만들어낸 ‘뉴로섹시즘(neurosexism·신경 성차별 혹은 뇌 성차별)’을 겨냥한다. 그는 현대사회에서 남녀차별이라는 말이 점차 멸종의 위기로 향하고 있으면서도 “남성의 뇌는 세계를 이해하고, 여성의 뇌는 사람을 이해한다”는 등 여전히 사회적 흐름에 반하는 주장이 나오는 것에 대해 강하게 비판한다. 그는 “남녀 뇌의 차이는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이 아니라 연구자의 시선이 반영된 결과물, 사회적·문화적 편견이 낳은 결과물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박동미 기자 pdm@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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