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is Story >고현석 “평생 쌓은 것 투입해 마을 일궈… 전원일기 속 ‘최불암’ 된 듯”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전남 곡성군 죽곡면에 조성된 전국 최대 규모의 은퇴자마을인 ‘강빛마을’의 고현석 촌장이 지난 1일 마을을 조성하게 된 계기를 설명하고 있다. 김낙중 기자 sanjoong@munhwa.com

전국 최대 규모 은퇴자마을인 ‘강빛마을’을 일궈 주목받고 있는 고현석(71) 촌장을 지난 1일 만났다. 강빛마을은 전남 곡성군 죽곡면의 대황강변에 자리 잡고 있었다. 고 촌장은 군수직에서 물러나 ‘야인’이 된 지 8년의 세월이 흘렀고 칠순을 넘긴 고령이지만 건강하고 활기차 보였다. 그는 마을을 조망할 수 있는 단지 위쪽으로 취재진을 안내했다. 화장산(해발 525m) 기슭에 조성한 마을(부지 13만3000㎡)에는 유럽풍의 2층짜리 가옥 109채가 질서 있게 자리 잡고 있었다. 가옥의 연면적은 100㎡로 동일하고, 스페인에서 직수입해 얹은 황토색 기와는 주변의 자연환경과도 잘 어울리는 듯했다. 가옥에는 ‘솔빛 ○호’ ‘별빛 ○호’ ‘달빛 ○호’ 등 자연친화적 이름이 붙어 있었다. 마을 입구 주변에는 관리동, 교육관, 문화관, 식당, 커피하우스, 편의점 등 공동시설과 편의시설이 있다.


고 촌장은 자신이 사는 집으로 안내해 구조를 설명했다.

“109채 중 몇 가구만 빼고는 대부분을 1층 67㎡(20평), 2층 33㎡(10평) 규모로 지었습니다. 1층에는 방 2개와 주방·거실이 있고 2층은 침대 2개를 갖춘 원룸 형태입니다. 2층에는 옥내 계단을 통해 올라갈 수 있지만 집 밖에서도 올라갈 수 있도록 문을 따로 냈습니다. 2층을 외부 손님들에게 내줘 펜션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설계한 것이죠. 다만 2층에는 취사 시설이 없습니다.”

고 촌장은 집을 지을 때 장수과학에 나오는 이론을 참고했다고 설명했다.

“장수과학을 보면 노인들이 사는 마을의 규모는 어느 정도 크고, 집은 작게 짓되 서로 가까워야 합니다. 마을이 너무 작으면 주민 편익시설을 갖추기 어렵고 전기, 수도 등의 서비스를 받을 때도 우선순위에서 밀릴 수 있습니다. 또 치매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사람과의 사귐, 지역·세대 간 교류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열린 마을’을 지향해 2층을 펜션으로 활용하려는 것입니다. 약 90가구로부터 방을 출자받은 뒤 세무서에 정식으로 펜션사업자(강빛마을 밸리홈)로 신고하고 운영하고 있습니다.”

고 촌장은 건축 재료와 집기 등도 건강을 고려해 선택했다고 했다.

“외벽과 내벽은 모두 숨쉬는 황토벽돌을 썼고 내부를 한옥의 목(木)구조로 만들었습니다. 가스가 주부들에게 좋지 않다는 말이 있어 1층 주방에 가스레인지 대신 인덕션레인지를 설치했습니다.”

이야기가 이쯤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전직 군수로 각인됐던 그의 이미지가 강빛마을 촌장으로 비쳐지기 시작했다. 그는 군수 시절 섬진강 기차마을과 심청축제 등으로 곡성 관광산업의 기반을 일구고 곡성을 친환경농업의 중심지로 발전시켰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런 고 전 군수가 전국 최대 규모 은퇴자마을의 촌장으로서 장수과학을 설파하고 있는 것이다. 강빛마을을 처음 구상하게 된 계기를 묻자 그는 거침없이 얘기를 풀어나갔다.

“농촌 공동화를 막아보자는 데서 출발했습니다. 8년 동안(1998년 7월∼2006년 6월) 곡성군수를 하면서 살펴보니 매년 인구가 줄어요. 원인은 자녀 교육 때문이었어요. 군청 직원이나 교사, 농협 직원 등이 자녀들을 광주, 순천 등 도시 학교로 보내기 위해 주민등록을 옮기기 때문이죠. 그래서 관내 학교 수를 과감하게 통폐합하고 교육의 질을 높이는 ‘농촌 적정규모 학교 육성시범사업’을 추진했으나 근본적인 해결은 안 됐습니다. 그러던 차에 서울대 의대 박상철 교수의 저서에서 ‘은퇴자들이 농촌에서 살아주면 농촌의 문제를 복합적으로 풀 수 있다’는 대목을 읽고 무릎을 쳤어요. 때마침 농어촌공사가 전원마을 조성을 위해 2004년 12월 곡성군을 포함한 전국 4개 군과 양해각서(MOU)를 체결했습니다. 그러나 농어촌공사는 2005년 말 사업 추진을 보류하자고 통보해 왔습니다.”

―초반부터 우여곡절을 겪었군요.

“MOU 체결 후 ‘알박기’ 등을 우려해 곡성군 지역개발협의회장 등을 통해 비밀리에 사업부지를 대부분 확보해 놓았는데 복병을 만난 거지요. 2006년 지방선거에서 3선 연임에 실패한 뒤 이 사업만큼은 내가 책임을 지고 매듭을 지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2007년 ㈜리버밸리를 설립해 후불 조건으로 사업 토지를 인수하고 2008년 3월 정부에 전원마을 신청을 했습니다.”

―입주자 모집은 순조로웠나요.

“애초에 사람 모으는 것을 너무 쉽게 생각했어요. 수도권 노인 270만 명 중 100여 가구를 모집하지 못하겠느냐는 계산이었지요. 전남은 환경이 좋고 생활비가 싼데, 서울의 아파트를 팔고 내려오면 여유있고 건강하게 은퇴 후 생활을 할 수 있다는 논리가 통할 줄 알았지요. 그런데 제 친구들조차 ‘서울에서 2시간 거리면 좋겠는데 너무 멀다’는 반응이었어요. 그래서 장수과학을 예로 들면서 나이 들면 공기 좋고 식재료가 신선한 환경에서 살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죠. 지난해 4월 20일 개촌하기 전에 109채를 모두 분양했고 등기까지 마쳤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외지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이 많다 보니 실제 입주한 사람은 3분의 1 정도입니다.”

―어쨌든 마을 조성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는데 그 요인은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이 일에 우리 부부가 살아오면서 평생 쌓은 것이 투입됐는데, 제가 돈을 떼먹지 않을 사람이고 무언가 일을 해낼 수 있는 사람이라는 두 가지 믿음을 주었나 봅니다. 사업 토지를 가진 분도 아무런 대가 없이 저를 믿고 빌려줬습니다. 저는 그래서 마을 주민들을 ‘불신시대를 살아가는 호걸들’이라고 말합니다. 공사 과정에서 길에 자재를 쌓아두거나 하는 등 민원도 있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협조해줬습니다.”

이 질문에 답한 뒤 그는 자신이 그동안 견지해온 삶의 방식과 자세에 대해서도 들려줬다.

“무엇이 돼야겠다는 식의 구체적이고 명확한 목표를 추구했다기보다는 매사에 정성을 다하고자 노력해온 편입니다. 명문 고교와 대학을 나왔다는 것만으로 당연히 나 자신의 생각과 행동과 성취가 우리 사회 공동선의 방향과 맞아떨어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살아왔습니다. 굳이 현재의 목표가 뭐냐고 물으면 건강하고 당당한 3기 인생을 살아가는 것과 명실상부한 지방자치를 구현하기 위한 유권자운동을 펼치는 것이라고 말하겠습니다.”

―‘3기 인생’이라는 단어가 다소 생소하게 들리는데요.

“독립된 성인으로 자기의 생을 살기 전에 부모에 의존했던 삶이 1기이고, 독립해서 스스로의 삶을 꾸리고 가정을 이루고 직장생활을 하는 것이 2기라면 직장을 그만두고 부부만 남아서 사는 것이 3기 인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촌장으로서 3기 인생은 어떻습니까.

“마을을 관리하면서 부부가 잘 살고 있습니다. (대황강 쪽을 가리키며) 강 건너편이 우리 마을로서는 보배입니다. 비포장 임도인데 일주일에 두어 번 그곳에서 달리기를 합니다. 30분이면 왔다 갔다 할 수 있는데 그 재미도 쏠쏠합니다. 마을 주민들은 그곳에서 걷기를 하며 즐거워합니다. 900m쯤 떨어져 있는 면소재지에서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사기도 합니다. 때로는 제가 드라마 ‘전원일기’에 나오는 최불암 씨 같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웃음)”

그러면서 그는 이 마을에 사는 즐거움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고 했다.

“군자삼락을 누리고 있습니다. 독서의 즐거움(배우고 때때로 익힘)과 관광안내의 즐거움(친구가 멀리서 찾아옴), 때때로 초청받아 강의하는 즐거움(영재를 교육함)이 있습니다. 스트레스 없이 살아서인지 최근 건강검진 결과 이 마을 입주 전에 비해 개선된 항목이 더러 생겼습니다.”

촌장의 지위에 대해 궁금해했더니 그는 무보수 봉사직이라고 했다.

“마을의 기본 모델은 자기의 생활과 건강을 스스로 책임지는 것입니다. 아직까지는 건강한 은퇴자들이 ‘9988’(99세까지 팔팔하게)에 목표를 두는 것이죠. 촌장은 그런 분위기를 이끌어가는 사람입니다.”

―주민들의 생활이 궁금합니다. 식사는 어떻게 하며 여가는 어떻게 보내는지요.

“100가구 넘는 규모로 출발했다면 처음부터 공동 식사를 추진해야 맞습니다. 그래야 여자분들이 가사 노동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 입주자가 3분의 1밖에 안 되다 보니 시기상조입니다. 입주민들은 취미 삼아 텃밭 가꾸기를 하는 사람이 많고 낚시를 하거나 바둑을 두고 탁구도 칩니다. 마을에서 12분 거리에 골프장이 두 곳이나 있어 친지들을 불러 함께 자고, 골프 치러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배움의 욕구가 강한 사람은 가까운 대학의 평생교육원 프로그램을 활용하기도 합니다.”

―밸리홈 사업은 잘됩니까.

“밸리홈 사업은 펜션 이용료를 받아 비용(직원 보수, 전기요금 등)을 제하고 남는 이익을 출자 지분별로 배당해주는 체계입니다. 지난해에는 흑자를 내지 못해 배당을 못했고 적자 부분을 우리 부부가 메웠습니다. 올해는 3월부터 정상화돼서 잘나가고 있었는데,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세월호 참사(4월 16일)가 발생한 후 타격이 큽니다. 당초 오기로 했던 수도권 학교 9개교의 수학여행과 호남대 중국인 유학생 및 학부모 캠프가 줄줄이 취소됐습니다.”

고 촌장은 베이비부머(1955∼1963년생)들의 은퇴가 본격화되면 은퇴자마을도 활성화될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전망했다.

“60대 이상의 사람들은 부부 중심의 삶을 생각해 보지 못한 세대입니다. 관계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이죠. 대가족 속에서 살다가 시대가 바뀌면서 소가족, 부부 중심으로 살아왔지만 여전히 자녀를 매개로 한 부부입니다. 늙어서 자녀와 함께 살 생각은 안 하더라도 부지불식간에 자녀 주변을 맴돌고 나중에는 자녀들의 보살핌을 받겠구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다시 말해 60대 이상은 은퇴 이후 부부 중심 생활을 준비하지 못한 세대입니다. 그러나 50대인 베이비부머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인터넷상에는 은퇴 후 전남에서 살기로 작정한 50대 연령의 그룹들이 꽤 있습니다.”

인터뷰=정우천 차장(전국부), 곡성 = sunshine@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