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評>反日 넘어 克日로 나아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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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효/성균관대 교수, 前 청와대 기획관

요즘처럼 일본 탓하기 쉬운 시절도 없을 것이다. 신사참배에서 일본군 위안부 강제 동원의 부정에 이르기까지 아베 신조 내각이 지난 1년반 동안 이어온 행보가 한·일 관계를 끝없이 악화시킨 진원지라는 명제에 토를 달 한국인은 별로 없을 듯하다. 며칠 전에는 일본 정부와 재판부가 조선에서 약탈해 간 귀중한 책자와 유물의 목록을 지속적으로 은폐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국민의 일본에 대한 실망감은 더욱 커졌다. 한·일 양국에 새 정부가 들어선 지 2년이 되도록 정상회담을 입에 담지도 못하는 기이한 상황 속에서 모든 것은 일본의 각성과 결단에 달렸다는 평론은 그간 수없이 개진됐다.

그렇다면 이제까지 한국 쪽에서 간과한 것은 혹시 없을까. 일본을 성토하고 꾸짖는 감정의 분출 말고 우리는 일본이라는 상대방의 무엇을 어디까지 바꿀 수 있을 것인지, 또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일본과의 관계를 어떻게 이끌어갈지에 대해 과연 냉철하게 접근하고 있는지 자문해 볼 필요가 있다. 나라 안팎의 정세를 직시하고 한·일 관계를 한국의 뜻대로 주도할 수 있어야만 일본에 대한 어떠한 도덕적 비판도 그 정당성을 부여받을 수 있다.

첫째, 양국 간 현안 가운데 위안부 문제처럼 시급하고 긴요한 것은 총력을 기울여 해결해 나가야 한다. 2012년 6월에 예정대로 한·일 정보협정이 체결됐더라면 그해 8월까지 위안부 문제는 이미 해결됐을 것이다.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한 일본 총리의 사과와 일본 정부의 배상금 지불은 이미 합의된 원칙이었다. 우리 외교 당국은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의 국가적·법적 책임 문제를 담아내는 데 있어 보다 유연해질 필요가 있다. 상대방이 이를 온전히 수용치 못할 정치적 이유가 있다면 적절한 표현과 해법을 찾아 신속한 결말을 이끌어내는 것이 외교의 지혜다. 일본의 지도자와 정부가 나서서 해결하는 형식 자체가 국가의 책임을 포함하는 문제 아닌가.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에 명시해 일본 측의 배상책임이 소멸됐다고 양국이 합의한 강제징용 피해자 문제는 위안부 문제와는 성격이 다르다. 우리 대법원과 지방법원이 일본 기업들의 배상책임을 아무리 촉구한다고 해도, 이미 이뤄진 국가 간 합의를 국제사법재판소(ICJ)에 제소해 확인받겠다는 일본 측의 의지만 부추길 뿐이다. 정부가 아닌 개인의 청구권을 보살펴야 한다면 강제징용 피해자 문제는 우리 정부와 기업이 나서서 해결해야 할 과제다.

둘째, 역사 교과서의 왜곡 등 당장 해결되기 어려운 과제는 상대방에게 무작정 설교하기보다는 차차 해결할 역량과 국제적 환경을 구비하는 데 힘써야 한다. 일본의 리더들이 자라나는 후대에 과거의 아픈 역사를 제대로 알리지 않는 것은 장래의 한·일 관계에 앙금으로 남을 것이다. 이것은 한국인이 분개하고 답답해할 일이지만 결국은 일본 스스로 자신의 미래와 결부해 감당해야 할 몫이다. 이웃 나라 국민의 믿음과 존경을 얻지 못하고서는 동북아시아와 세계의 리더 역할을 자처하는 성숙한 대국이 될 수 없으며, 이는 중국과 한국을 마주하는 일본이 넘어서야 할 숙제다.

셋째, 과거사 이슈에 어깃장을 놓는 일본이 아무리 밉더라도 우리에게 필요한 안보 협력마저 방치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지난주 미국에서 개최된 한·미·일 1.5트랙 외교국방회의에서 미국과 일본의 참가자들은 우리 측에 공통된 질문을 던졌다. 북한의 도발이 발생하고 한반도에 급박한 사태가 전개되더라도 아베 정권이 밉다고 일본과의 안보 협력을 거부할 것이냐는 물음이었다. 일본이 제3국의 도발에 맞서 우방들과 함께 싸울 수 있다는 집단자위권은 평화헌법 제9조를 고치지 않는 한, 논리적인 비약임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미국과의 동맹관계를 공유한 처지이자 같은 민주주의 인권 국가로서 대한민국이 일본을 적대국 보듯이 해서야 될 일인가.

박근혜 대통령이 어려운 양국 관계의 와중에 지난 25일 아베 총리의 안부를 전하러 온 마스조에 요이치 도쿄도지사를 접견했다. 한·일 간 고위급 파이프라인이 새롭게 구축돼야 할 시점이다. 반일(反日)에만 매몰돼서는 극일(克日)로 나아갈 수 없다. 이제까지 많은 사람이 대안도 없이 국민을 선동하면서 애국자인 듯 행세해 왔다. 옥석(玉石)을 가려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