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is Story >에네스 카야 “한국어로 꿈 꿀만큼 한국을 사랑해… 술문화만 빼고”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 12년째 방송인, 사업가, 통역가로 살고 있는 터키인 에네스 카야는 “나는 뼛속까지 터키인이지만 한국을 정말 사랑한다”고 말했다. 정하종 기자 maloo@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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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월드컵이 한창이었던 2002년 6월 29일. 한국과 터키의 3-4위전에서 불과 11초 만에 골이 터졌다. 월드컵 역사상 최단시간 골이었다. 고향인 터키에서 이 경기를 보고 있던 에네스 카야(30)는 창문을 열고 환호성을 질렀다. 당시 나이 18세였던 에네스는 그때 처음으로 ‘한국’이라는 나라를 접했다. 하지만 그는 몰랐다. 향후 그가 한국어로 대화를 하며 한국에 터를 잡게 될 것이란 사실을.

종합편성채널 JTBC ‘비정상회담’에서 한국인보다 한국인 같은 말투와 사고를 가진 터키인으로 주목받고 있는 에네스 카야는 지난 2002년 9월 한국에 왔다. 그리고 12년 동안 한국에서 살며 사업을 하고 있으며 결혼을 했다. 하지만 “귀화는 생각없다”는 그는 터키와 한국을 모두 사랑하는 진정한 다중국적자였다.

지난달 말 유명 토익 학원이 밀집된 서울 강남역의 한 카페에서 에네스를 만났다. 토익 학원에서 쏟아져 나오는 한 무리 학생들을 보며 “터키에서도 저렇게 토익 공부를 하냐”고 묻자 그는 “음∼저 정도는 아니에요”라며 손가락으로 ‘X’표를 그리며 웃음을 지었다. 보면 볼수록 놀라운 한국어와 한국식 표현 능력이었다. 이어지는 인터뷰의 모든 답변은 에네스가 구사한 표현을 그대로 담았다.


―한국에 오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

“터키와 한국의 3-4위전이 끝나고 3, 4일 정도 지났을 때였어요. 아빠가 ‘한국에 갈래’라고 물어보셨죠. 한국에서 일하는 아빠 후배를 통해 한국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유학을 가기로 결정했어요. 마음먹기까지 열흘 정도 걸렸던 것 같아요. 그리고 1년 정도 어학연수를 마치고 한양대에서 정보기술경영을 전공했어요. 04학번으로 입학했죠.”

―한국은 교육열이 대단하다. 한국에서 공부하기가 만만치 않았을 텐데.

“에이, 터키도 만만치 않아요. 아빠도 내심 한국으로 가길 원하셨고 나도 한국이 좋을 것 같아서 선택했어요. 그래도 저는 외국인이기 때문에 수능은 보지 않고 지원할 수 있었죠. 당시 서울대 고려대 한양대까지 세 군데 다 붙었는데 장학금을 받고 한양대를 선택했어요. (웃으며) 셋 다 명문인 건 저도 알아요. 원래는 심리학을 좋아하는데 전 세계 어딜 가도 써먹을 수 있는 전공을 고민하다가 정보기술경영을 택했어요.”

―들으면 들을수록 한국어 구사 능력이 대단하다. 원래 어학 습득력이 좋았나.

“어학을 배울 때 중요한 건 능력보다는 재미예요. 일단 한국어가 좋고 재미있으니까 빨리 늘었죠. 외국어를 빨리 익히려면 그 나라 이성을 사귀라고 하는데 꼭 그런 건 아니에요. 일단 말이 통해야 여자도 사귀죠. 터키어와 한국어의 어순이 같은 게 큰 도움이 됐어요. 터키와 한국은 역사도 비슷해서 터키의 역사책을 번역하면 70% 정도는 한국인들도 이해할 수 있어요. 내가 좋아서 한국어를 열심히 공부한 거고, 그래서 불을 ‘켜다’와 ‘키다’, ‘틀리다’와 ‘다르다’도 구분해 쓸 수 있게 됐죠.”

―한국으로 귀화하라는 제안을 받아 보진 않았나.

“많이 받았죠. 하지만 저는 뼛속까지 터키인이에요. 한국은 이중국적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한쪽 국적을 선택해야 해요. 하지만 터키를 포기하면서까지 한국 시민권을 받아야 된다는 생각은 없어요. 한국에서 터키인으로 사는 게 좋은 거죠.(웃음)”

―왜 한국에 터를 잡았나.

“터키 속담 중에 ‘태어난 곳이 아니라 먹고사는 곳이 고향이다’란 말이 있어요. 일단 한국 대학을 다니다 보니 졸업 전에 일도 시작하고 방송에도 출연하고, 여러 기회가 주어졌어요. 그러다 보니 한국에 정이 들었죠.”

―방송 활동은 언제 시작했나.

“2007년에 MBC ‘느낌표’에 6개월 정도 출연했어요. 외국인 4명이 한국 문화를 재발견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프로젝트였죠. 그 뒤로 방송 활동을 계속하면서 영화 ‘초능력자’에도 출연했어요. 그리고 10월에는 임수정 씨와 함께 출연한 영화 ‘은밀한 유혹’이 개봉해요. 그런데 요즘처럼 관심을 받아본 건 처음이에요. ‘비정상회담’이 정말 인기가 있기는 한가 봐요.”

―FC서울에서 일한 적도 있었다고.

“2009∼2010시즌 때 FC서울의 귀네스 감독님의 통역을 맡았어요. 한국에 사는 터키 사람이 많지 않기 때문에 지인을 통해 소개받았죠. 귀네스 감독님이 3년간 한국에 있었는데 마지막 1년을 저와 함께했어요.”

인터뷰 도중 전화벨이 울렸다. 에네스는 “중요한 전화여서요. 잠시만요”라고 양해를 구했다. 에네스의 지인이 이태원에서 사고를 당해 한국어에 익숙한 그가 대신 사고를 처리해 주는 내용의 통화였다. 아마도 전화기 너머 상대는 에네스의 목소리만 듣고 그가 한국인이라 생각한 듯했다. 에네스가 말했다. “네 네, 저는 터키 사람이에요. 혹시 메모 가능하세요? 부를게요. 받아 적으세요. 공일공(010) 이칠하나칠(2717)….”

어떤 한국식 농담도 무리없이 받아넘겼지만 에네스는 2시간 가까운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 물 한모금 마시지 않았다. 해가 떠 있는 동안에는 이슬람교인들은 아무것도 먹을 수 없는 라마단 기간이기 때문. 한국에서 살지만 터키인의 고유한 문화는 지키려 하는 에네스는 “차 한잔 사겠다. 뭐 마시겠냐”는 기자의 호의도 정중히 사양했다.

―이제는 한국어가 터키어보다 편할 것 같다.

“맞아요. 터키 친구들이랑 통화할 때 가끔 터키어가 생각나지 않을 때가 있어요. 한국에 있는 터키 친구들과도 한국어로 대화를 나누고 꿈도 한국어로 꿔요. 이런 제 모습을 보며 엄마가 좀 서운해하시기도 해요.”

―외국인에게 한국은 살기 좋은 곳인가.

“그럼요. 그래서 제가 떠나지 못했어요. 사람들이 착하고 정이 많아요. 제가 터키인이라 ‘플러스 알파’가 돼요. 터키는 ‘형제의 나라’니까요. 돌궐 시대 때부터 한국과 터키의 우정과 인연은 대단했어요. 한국인들은 외국인 중에서 터키인에게 더 친절해요.”

―에네스에게 ‘한국은 형제의 나라’라는 인식을 심어준 사람이 누구인가.

“제게 한국을 알려준 아빠 후배예요. 그 후 한국에 처음 도착해서 친구집으로 가려고 택시를 탔는데 기사님이 ‘어디서 왔냐’고 물으셨어요. ‘형제의 나라인 터키에서 왔다’고 했더니 가방에서 빵도 꺼내 주시고 요금도 반만 받으셨어요. 터키를 정말 좋게 생각하고 있는 거죠.”

―‘비정상회담’을 보면 에네스는 참 보수적인 사람이란 생각이 든다.

“제가 보수적인 건 인정해요. 하지만 ‘보수적’인 것과 ‘꽉 막힌’ 건 달라요. 저는 자라온 환경과 문화를 유지하려는 것뿐이에요. 그걸 보고 보수적이라고 한다면 보수적인 거죠. 하지만 그걸 나쁘다고 할 순 없는 거 아닌가요?”

―터키의 문화가 보수적인 편인가.

“전 터키의 대표가 아니에요. 제 생각을 말하는 것뿐이죠. 제 이야기를 듣고 ‘보수적이다’ ‘독설이다’고들 하는데 오히려 많은 한국 남자들이 공감한다는 이야기도 들었어요. 그래서 저는 남자팬이 많은 편이에요.(웃음) 터키의 문화가 보수적이라고 규정할 순 없지만 터키와 한국의 문화가 상당히 비슷한 것 같긴 해요.”

―‘비정상회담’에서 생각이 다른 외국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대립할 때도 있지 않나.

“그동안 외국인이 출연하는 프로그램이 너무 많았어요. 하지만 대부분 비슷비슷해서 금방 없어졌죠. 제작진과 미팅을 하고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보라 해서 ‘이 프로그램이 얼마나 갈 거 같아요?’라고 물었죠. 황당해하면서 제게 ‘에네스가 볼 때는 얼마나 갈 거 같으냐’고 되물었어요. 새로운 것을 찾지 못하면 5회 안에 끝날 거라 했죠. 하지만 ‘비정상회담’은 단순한 수다와 에피소드 나열이 아니라 한국인의 고민에 대해 진지하게 토론을 한다는 점에서 달라요. 그래서 꽤 오래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인터뷰 내내 한국인과 대화하는 것 같다. 그럼에도 에네스가 적응 안 되는 한국 문화가 있나.

“적응 안 되는 건 없는데 좀 바뀌어야 할 건 있어요. 술문화요. 한국 사람들은 터키 사람들이 물 마시듯 술을 마셔요. 술을 안 마시면 친해질 수가 없어요. 이런 마인드를 바꿔야 해요. 이건 술 안 마시는 사람들에게는 고문이에요. 이런 문화는 좀 바뀌었으면 좋겠어요.”

안진용 기자 realyong@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