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낌이 있는 ‘新 풍물기행’>문예회관·소극장 붉은 벽돌 뒤덮은 ‘욕망과 열정’의 포스터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그래픽=송재우 기자 jaewoo@munhwa.com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서울 대학로의 상징적인 장소인 마로니에 공원에는 언제나 오가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젊음의 생기와 나무 그늘의 여유가 공존하며 지나는 이들을 끌어들인다. 정하종 기자 maloo@munhwa.com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소극장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는 대학로 골목골목에는 연극의 작은 속삭임이 꿋꿋하게 살아 있다. 정하종 기자

대학로에 대한 글을 부탁받았다. 대학로라고? 아무 걱정 없었다. ‘내가 대학로에서 연극을 한 지가 벌써 몇 년인데 그거 하나 못 쓸 것 같아?’ 이랬다. 대학로에 극단 연습실을 장만하며 둥지를 튼 게 1991년 초. 그러니까 지금부터 24년 전의 일이었다. 아주 잘 쓸 수 있었다.

“대학로는… 어 그러니까 대학로는 어떤 곳이냐 하면… 그런데, 어 그게….”

너무 익숙했었다. 공기처럼, 물처럼, 햇빛처럼. 나는 대학로를 너무도 당연시하고 타협하며 흘러가는 대로 살고 있었던 것이다. 입은 바짝바짝 타들어가고 손가락은 자판 위를 계속 맴돌고 있었지만 대학로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뱉어낼 수가 없었다.

“그래, 제일 먼저 대학로에 얽힌 기억들을 끄집어내 보는 거야!”

이 생각이 떠오른 것이 탈출구의 발견이었다.

앞에 썼듯이 1991년 초, 대학로 동숭아트센터 뒷골목 지하에 스무 평짜리 연습실을 장만하며 대학로 생활이 시작되었다. 아니 생각해 보니 그게 아니었다. 1980년대 초, 지금은 아르코예술극장이란 이름으로 불리는 당시의 문예회관 대극장의 객석에 앉아 헬렌 켈러와 설리번 선생님을 보며 눈물 흘리고 해학 넘치던 서울말뚝이와 함께 덩실대며 웃어대던 고등학교 연극반 시절이 대학로와의 첫 만남이었다. 아니 이것도 전부가 아니었다. 초등학교(당시는 국민학교였다) 4학년 때 효제국민학교로 전학을 오게 된 그날부터 대학로와의 인연은 시작되었다.

1973년이었다. 집안이 기울어 모든 걸 정리하고 종로구 충신동으로 이사를 오며 종로5가에 있는 효제국민학교에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야구부를 하고 싶었지만 돈이 드는 장비를 살 수 없어 공 하나만 있으면 되는 축구부를 하게 되었다. 하지만 야구가 너무 하고 싶어 장비가 있는 친구들과 어울려 방과후에 야구를 하러 다닌 곳이 관악캠퍼스로 이전하기 전의 서울대 운동장이었다. 지금의 마로니에공원 건너편인 서울대병원이 있는 자리로 기억되는데 철문과 담을 넘어 경비아저씨의 눈을 피해 숨어 다니며 매일같이 야구를 했었다. 경비아저씨에게 걸리는 날은 다들 용돈을 털어 담배 한 갑을 사드리며 운동장 사용을 애걸하곤 했다. 당시 서울대가 이전하는 중이어서 그랬는지 내가 야구를 하던 운동장도, 그 운동장을 오가며 매일 접했던 지금의 대학로 거리도 매우 한산했던 걸로 기억하고 있다. 서울의 중심인 종로와 인접해 있지만 매우 조용했고 나무들이 참 아름답던 거리. 내 대학로의 첫 기억은 이랬다.

그다음 대학로와의 인연은 고등학교 연극반 시절이었다. 용돈만 모아지면 명동 25시 음악사에서 예매표를 구입해 마로니에공원 옆 문예회관 대극장으로 연극을 보러 달려오던 꿈 많던 빡빡머리 소년. 그게 나였다. 1980년대 초반 대학로에 문예회관이 지어지면서 대학로가 연극의 중심지로 바뀌게 되는 전기가 마련됐다. 안국동의 실험극장, 명동의 창고극장, 남산의 드라마센터 그리고 신촌의 실험적인 소극장들이 중심이었던 연극이 대학로 시대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문예회관과 샘터파랑새극장 그리고 지금의 켄터키프라이드치킨 뒤편에 있었던 바탕골 소극장이 초기 대학로 연극시대의 초석이 되었던 극장들이다. 마로니에공원과 인접한 문예회관은 그 옆에 있는 미술관과 함께 건축계의 거목이신 고 김수근 선생의 설계로 지어진 극장이다. 붉은 벽돌로 외관이 이뤄진 두 건물은 지금도 대학로의 랜드마크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고즈넉하면서도 위엄 있는 자태를 지니고 있다. 마침 당시 샘터파랑새극장이 있는 샘터 본사 건물과 바탕골 소극장이 있던 바탕골미술관 건물(지금은 없어진)도 붉은 벽돌로 이뤄져 매우 차분하면서도 조화로운 모양새였다. 그뿐만이 아니라 초창기 대학로가 형성될 때의 주요 건물들은 모두 붉은 벽돌을 외장재로 사용했었고 붉은 벽돌의 차분하고 고즈넉한 이미지는 내가 대학 연극반 시절 연극을 보기 위해 대학로를 찾았을 때까지도 쭉 이어졌던 대학로에 대한 나의 두 번째 기억이었다.

1986년, 하고 싶은 연극을 독립적으로 하고 싶어 또래들과 함께 겁 없이 ‘작은신화’라는 극단을 만들었다. 공짜로 빌릴 수 있는 연습공간을 전전하며 신촌의 소극장을 중심으로 공연을 하다 앞에 썼듯이 대학로에 연습실과 사무실을 마련하게 된 것이 1991년. 지인을 통해 알게 된 한 독지가의 전적인 도움으로 대학로에 둥지를 틀 수 있게 된 것이었다. 1990년대의 대학로는 혼돈과 열정이라는 기억으로 내게 남아있다. 나 스스로의 연극관도 혼돈과 열정 속에 있었겠지만 당시 하루가 다르게 팽창하는 소극장들과 공연들의 숫자, 그리고 그에 따라 대학로의 모든 거리를 도배하듯 뒤덮은 어마어마한 포스터의 물량 공세는 말 그대로 거대한 혼돈이었다. 한산함과 고즈넉한 붉은 벽돌로 이뤄진 대학로에 대한 나의 기억들은 송두리째 뒤집어엎어져 버렸다. 당시 일요일마다 시행된 ‘차 없는 거리’도 대학로를 아수라장으로 만드는 데 일조를 했다. 미성숙된 시민들의 문화의식과는 상관없이 관제행사로 치러진 술과 일탈로 얼룩진 ‘차 없는 거리’의 혼돈은 대학로의 정체성에 혼란을 불러왔고 그즈음부터 대학로에 유흥업소와 함께 이른바 ‘야한 연극’이라는 상업극이 비집고 들어오게 된다. 대학로에 대한 나의 옛 기억들은 마치 남의 것처럼 멀어져 갔다.

그리고 21세기. 대학로는 이 지구상에서 연극을 위한 소극장 밀집도가 가장 높은 지역으로 존재하고 있다. 120개가 넘는 극장에서 매일같이 연극 공연이 올라간다. 아니 연극과 연극을 표방한 공연들이 올라간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겠다. ‘야한 연극’이 성행하더니 ‘개그 연극’이 그 뒤를 따르고 이제는 ‘로코’라 불리는 ‘로맨틱 코미디’가 대학로를 찾는 사람들을 유혹한다. 붉은 벽돌의 고즈넉함은 쉽게 찾아보기 힘든 시대가 된 것이다. 그래도 나는 대학로에 있다. 그리고 대학로로 사람들을 부른다. 호객꾼들의 외침 뒤로 혼돈을 넘어선 연극의 작은 속삭임이 꿋꿋하게 살아있고 화려하지만 차가운 유훙가의 네온 불빛 뒤로 소박하지만 따뜻한 연극의 온기가 아직도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 글을 쓰며 나는 대학로의 소중함을 다시 느낀다. 대학로에 몸담고 있는 나조차 포기하고 잊었던 대학로의 기억들을 다시 떠올리며 이 거리에 아직 남아있는 희망을 보듬어 본다.

다들 대학로에 한번 나오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