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반을 꿈 꾼 노비집안… 드라마틱한 ‘신분상승’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노비에서 양반으로 그 머나먼 여정 / 권내현 지음 / 역사비평사

선택의 여지없이 주인 집안의 소유물로 태어나 평생 노동과 착취, 천대와 멸시 속에 살아야 했던 조선의 노비. 누군들 이 같은 삶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겠는가. 책의 주인공인 조선 숙종대, 경상도 단성현 종 8품 무신 집안의 사노비 김수봉도 그랬다. 하지만 그는 신분적 억압을 숙명으로 여기고 주인에게 평생 노동력을 바친 숱한 노비들과 달랐다. 그렇다고 도망치거나 신분제에 저항한 혁명가적 기질은 없었다.

대신 그는 자신의 경제력으로 국가에 상당량의 곡식을 바치고 노비에서 탈출해 평민이 됐다. 그 뒤 200여 년에 걸쳐 김수봉 가계는 후손과 후손으로 이어지면서 평민에서 중인, 중인에서 양반으로 일종의 신분세탁이자 신분 상승을 해나간다.

권내현(역사교육) 고려대 교수가 조선시대 호적대장을 기초로 추적, 구성한 김수봉 가계의 ‘양반을 향한 200여 년의 여정’은 흥미진진하고 드라마틱하다.

자유로운 삶, 더 나은 삶을 향한 열망과 욕망의 기록이자, 이들 가계가 살아낸 시대 전체를 보면 신분제 사회가 균열을 보이며 해체돼 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저자의 가계 추적은 1717년 경상도 단성현 호적대장에 등장하는 평민, 김흥발에서 시작된다. 호적대장은 조선시대에 3년마다 거주민 전체를 대상으로 작성된 공식 기록이다. 호적대장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김흥발은 고읍대촌 제1통 통수, 어영청 보인이다. 오가작통제(五家作統制)에 따라 다섯 호가 속한 통을 책임지는 통수, 지금으로 치면 반장이나 통장쯤에 해당하는 이로, 도성 방어를 책임지는 어영청에 소속된 군인을 보조하는 보인이다. 아버지는 납속통정대부 김수봉. 즉 국가에 상당한 곡식을 바쳐 정 3품에 해당하는 통정대부라는 관품을 얻은 평민이다. 그런데 저자는 김흥발의 아버지 김수봉과 달리 그의 조부, 증조부는 아무런 직책도 표시돼 있지 않다는 단순한 사실에서 흥미로운 의심과 드라마틱한 가설을 품는다.

김흥발 집안은 원래 노비 출신으로 아버지 김수봉대에 노비에서 탈출, 평민으로 신분 이동을 했다는 것이다. 노비가 ‘무슨 능력으로’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당시 노비들 중에 노비나 토지를 가진 이들이 드물지 않아, 1729년 경상도 용궁현에서는 전체 토지의 약 10%가 노비 소유였다고 한다.

저자는 앞뒤 시기 호적대장을 뒤져 단성현에 살았던 종 8품, 심정량의 사노비 수봉을 찾아내고 생년, 친척, 가족관계 등을 비교해 수봉이 김흥발의 아버지 김수봉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이어 역시 호적대장으로 이들의 후손들을 추적한다. 호적대장이 모두 남아있지도, 또 거기서 얻을 수 있는 정보도 완벽하지 않기에 김수봉 가계 역사의 중간 중간엔 구멍이 날 수밖에 없다.

이 빈 곳들을 저자는 역사에 대한 전문적 지식과 지식 위에 선 논리적 상상력으로 메워나간다. 일종의 팩션(Faction) 작업이다. 이 작업을 통해 김수봉과 그 후손들이 여러 대에 걸쳐 노비라는 운명을 탈출해 성과 본관을 갖춘 평민으로, 다시 중간층으로, 이어 양반으로 사회적 성장을 해나간 역사를 드러낸다. 김수봉의 막내아들이 처음으로 평민의 의무인 군역에서 돈을 써 벗어난 뒤, 손자·증손자대엔 상당수가 중간층으로 상승했고, 1830∼1860년, 5세손과 6세손대에 이르러 상당수가 양반 위치에 올랐음을 추적해낸다.

호적으로 복원한 하천민의 성장사인데, 다만 이들은 양반의 외양은 갖췄으나 과거를 통한 관직이나 학문의 세계에는 진입하지 못했다.

저자는 조선후기까지도 학문과 지적 영역에 접근한 하천민 출신은 극소수에 불과했다며 이는 근대 이후 그들 앞에 놓인 새로운 도전이었다고 설명했다.

책을 마무리하며 권 교수는 “학력이 새로운 성장 도구가 되면서 수봉 같은 숱한 개인들이 성장의 기회를 잡았다”면서도 “하지만 오늘날 경제력과 학력은 다시 특권화돼 대물림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태어나면서 이미 출발선이 다른 신양반층이 만들어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최현미 기자 chm@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