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닭치高’ 야당

이용식 / 논설실장

요즘 인기 있는 TV 개그 코너 중에 ‘닭치고(高)’가 있다. 학생 3명과 담임, 교장이 엉뚱한 행동을 하다가 금방 잊어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일을 되풀이하며 시청자를 웃긴다.

문희상 의원이 또다시 비상대책위원장을 맡게 된 지금 야당 상황이 딱 그렇다. 2012년 12·19 대선 패배 후 20일 만에 문 의원은 비대위원장에 추대됐다. ‘백척간두 진일보’라며 “60년 정통야당이라는 역사만 빼고 모든 것을 바꾸겠다”고 외쳤다. 5개월 뒤 전당대회에서 선출된 김한길 대표 역시 “60년을 지켜온 민주당의 영혼만 빼고 모든 것을 버려야 살 수 있다”고 했다. 올해 공동대표 형식으로 합류한 안철수 의원은 지난 4월 2일 국회 대표연설에서 “그 어떤 정치의제도 민생에 우선일 수 없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바뀐 것은 없었다. 7·30 재·보선에서 참패하자 또 비대위가 꾸려졌다. 박영선 원내대표가 위원장을 맡아 ‘탈(脫)투쟁정당’을 내세웠지만 말뿐이었다. 탈당설 소동 끝에 복귀해서는 “백척간두 위기에 처했다. 60년 전통의 뿌리만 빼고 끊임없이 혁신해서 바꿔야 한다”고 했다. 이렇게 돌고돌아 다시 문 의원이 비대위원장이 됐다.

지금의 야당은 대선 패배 이후 정상체제보다 비상체제가 더 길었다. 국가라면 최악의 독재국가이거나 정치 최후진국인 셈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비상체제를 계속하고도 변화를 이뤄내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당내 사정을 들여다보면 혁신은커녕 되레 퇴행하고 있다. 안 의원까지 가세했지만 지지율이 20%를 오르내리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도대체 왜 이럴까.

1992년 12월 19일 새벽 3시쯤 김대중(DJ) 대통령후보는 잠자리에서 일어나 이희호 여사에게 말했다. “다시 대통령이 되지 못했소. 나의 노력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당신은 알 것이오. 그런데 다시 국민의 마음을 얻지 못했소. 마음을 결연하게 정리하려고 하는데 동의해 줬으면 좋겠소.” 정계은퇴 성명을 받아적는 이 여사의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여보, 사형선고 받았을 때를 생각하면 이 정도는 웃을 일 아니오.” 몇 시간 뒤 민주당 당사에 들어서자 당원들이 울음을 터뜨렸다. DJ는 원래 눈물이 많은 사람이다. 그러나 결코 눈물을 보여선 안된다고 다잡았다. 패배는 자신에게 국한시키고, 당은 다시 일어서도록 해야 했기 때문이다. “오늘로서 국회의원직을 사퇴하고 평범한 시민이 되겠습니다. 앞으로 당과 동지 여러분의 발전에 미력이나마 헌신 협력할 것을 다짐하는 바입니다.” 전국의 지지자들이 통곡했지만 DJ는 눈물을 삼켰다.

오래 전 장면을, 그것도 2년 뒤 번복된 사연을 되새겨보는 것은 현재 야당 위기의 정곡을 찌르기 때문이다. DJ 정치 입문이 1954년, 반(反) 이승만 세력의 민주당 창당이 1955년이므로 그의 정치인생은 그대로 야당사(史)다. 그럼에도 깨끗이 당과 정치와 선을 그었다. 패인(敗因)을 청산하고 그 자리를 새로운 것들로 채우지 못하면 다음 승리를 기약할 수 없고, 후보가 버티고 있으면 그런 작업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예 영국으로 떠났다. 고통스러웠지만 과감한 전환이 있었다.쿠데타 세력과의 DJP 연합도 그래서 가능했다. 야당도, DJ도 다시 국민의 선택을 받았다. 지금 야당은 거꾸로 가고 있다. 이상돈 교수조차 수용하지 못한다.

DJ가 지겹도록 강조한 것은 ‘국민의 지지’였다. 야당 의석이 100석에도 못미쳐 거대 여당을 감당하기 어려울 때에도 ‘국회야말로 야당이 사수해야 할 정치 무대’라며 함부로 포기하지 않았다. 지금 야당은 정반대다. 국민 다수가 반대하는데도 툭하면 국회 밖으로 나간다. 이런 문제를 알면서도 실천하지 못하는 것이 야당 위기의 본질이다. 문희상-김한길-안철수-박영선 체제까지 네 번 기회가 있었지만 모두 ‘닭치고’식이었다. 문재인 전 후보는 벌써 ‘끝이 시작이다’라고 선언했다. 알고도 행하지 않으면 결국 큰 화를 초래한다(知而不從禍莫大焉). 국민의 신뢰와 사랑을 받는 대안 야당은 꼭 필요하다. 그런데 벌써 관리형 분석이 나오는 ‘2차 문희상 비대위’가 뭘 할 수 있을까. 문 의원은 1차 비대위 성과에 대해 스스로 F학점을 매겼었다. 당 혁신 환경은 그때에 비해 훨씬 나빠졌다. DJ가 환생한다면 아마 집권 전망이 흐린 당과 노선은 포기하고 풍찬노숙을 감수하더라도 다른 길을 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