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안전문화는 ‘겁’을 먹고 자란다

장재선 / 문화부장

“대한민국 전역에 안전 정책이 확대될 수 있는 바로미터가 되겠다.” 이재명 성남 시장은 기염을 토했다. 지난 6·4 지방선거를 앞두고 ‘성남 안전정책’을 발표하면서였다. 그의 말은 결과적으로 맞았다. 성남 판교 환풍구 참사는 안전 정책이 확대될 수 있는 자성의 계기가 됐으니까.

그는 세월호 참사 진실 규명을 둘러싼 논란 과정에서 누구보다 앞장서 분노의 목소리를 쏟아냈다. “세월호 참사에서 ‘광주 사태’의 데자뷔를 느낀다.” “참사에 대한 국가의 책임은 무한대다. 가장 큰 책임은 대통령에게 있다.”

그랬던 그가 자신의 지역에서 발생한 참사에 대해선 ‘나는 책임이 없다’는 것을 주장하는 데 우선적으로 힘을 쏟았다. 우리 사회 지도층에게 흔한 모습이지만, 안전 문제에 대해 입바른 소리를 했던 그이기에 씁쓸한 느낌은 컸다.

아마 그도 몰랐을 것이다. 수많은 지역 중에 하필이면 자신의 관할 시에서 참사가 벌어질 줄은. 자신이 축사를 하기 위해 앉아 있던 그 자리 앞에서 시민들이 숨져갈 줄은.

이번 사건이 발생한 직후에 자살한 행사 안전 담당자의 사연은 참으로 가슴 아프다. 그가 투신 직전에 남긴 글의 첫 대목.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아왔는데 생각지도 못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이번 참사가 주는 교훈의 핵심이 바로 이것이다. 안전 사고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벌어질지 모른다. 안전 문제에 대한 경각심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일상에서 그것을 자각하지 않는다.

“내가 좋아하는 가수 공연을 보기 위해서라면 나도 환풍구에 올라갔을 거야.” 사고가 난 후 주변에서 이렇게 말하는 것을 많이 들었다. 평소 안전 수칙을 지키지 않는 스스로에 대한 자괴의 목소리들이다.

기억할 것이다. 세월호 참사가 났을 때, 우리 사회를 뒤덮었던 다짐. “이제 우리 사회 안전 의식도 성숙해야 한다. 기본과 원칙을 지키자.”

그로부터 6개월, 변한 게 없다. 단풍 행락객들이 산 밑에 경쟁적으로 불법 주차를 하는 데서 보듯 무원칙이 여전히 활개를 친다. 남이 보거나 말거나 교통 신호 위반은 다반사다. 음주 운전 무용담도 끊이지 않는다. 택배 기사가 과속한다고 나무라면서도 내가 시킬 때는 빨리 오라고 성화를 댄다. 거리에선 시위대가 도로를 예사로 불법 점거한다. 공권력이 제재를 하려들면 ‘네까짓 게 뭔데 명령질이냐’며 오히려 혼을 낸다.

우리 사회에 ‘안전문화(safety culture) 운동’이 도입된 지 20년이 됐다는 게 부끄러울 정도다. 안전문화는 일상 생활 전반에 걸쳐 안전에 관한 태도와 의식이 체질화하고 가치관으로 정착하는 것을 말한다. 1980년대 말 옛 소련 체르노빌 원자력 누출 사고 이후 생긴 개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이후 정부 주도로 운동이 시작됐다. 각 지방자치단체마다 안전문화협의회가 구성돼 구체적 실천에 앞장서고 있다. 그동안 동네·가정 생활, 식품, 교통, 산업 분야에서 어느 정도 성과를 냈다. 그러나 나와 내 이웃들의 의식, 태도를 보면 안전문화 정착은 요원해 보인다.

‘느리고 비싸게.’ 안전 문제 전문가들이 강조하는 모토다. 사실 안전을 지키려면 시간과 돈이 많이 들어간다. 이번에 주최 측이 사전에 안전 대책을 종합적으로 세우고 안전 요원을 충분히 뒀으면 이익이 적었을 것이다. 그것을 기꺼이 감수하는 게 선진 사회다.

무엇보다 두려움을 가져야 한다. 내 이익을 챙기려고 안전을 소홀히 하면 이웃을 살상하고 공동체를 파괴할 수 있다는 것. 우리 사회엔 이 두려움이 적다. 빨리 싸게 지어 ‘대박’ 치려는 사람들과 경쟁하며 생존하기 위해 배짱으로 무장한 탓이다. 안전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이 배짱을 접어두고 두려움을 꺼내야 한다. 겁이 많아서 가정과 직장, 사회 생활에서 안전을 섬세하게 따지고 챙겨야 위험 사회 요소가 줄어든다.

이번 참사 이후에 시민 의식이 높아져야 한다는 각성이 다시 일고 있는 것은 불행 중 다행이다. 이 각성에 덧붙여 꼭 이야기돼야 할 게 있다. 이른바 사회 지도층이 국민의 시선을 두려워하며 편법과 특혜를 멀리할 때, 사회 구성원들이 기꺼이 기본과 원칙을 지키게 된다는 것. 이 토양 위에서 대한민국의 안전문화가 성숙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