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브라인’ 집착 ‘쪽대본’에 무감각…위기의 지상파 드라마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케이블채널 tvN 드라마 ‘미생’이 화제다. 원작 웹툰이 워낙 큰 성공을 거둔 터라 시작 전부터 기대를 모았고, 깔끔한 연출로 호평받고 있다. 여기서 문득 드는 궁금증 하나. 이 좋은 콘텐츠를 왜 지상파가 외면했을까? 하지만 엄밀히 말해 지상파는 외면당했다.

원작자인 윤태호 작가는 최근 진행된 기자간담회에서 “많은 분들이 지상파에서 ‘미생’을 방송하면 러브라인이 추가되기 때문에 안된다는 말을 했다. 러브라인보다는 뉘앙스 정도만 있는 드라마로 갔으면 어떨까 싶었는데 실제로 지상파 측에서는 그런 부분에 대해 포기를 못하더라”고 밝혔다. 드라마에는 러브라인이 있어야 한다는 뻔한 공식에 사로잡혀 있는 지상파가 ‘미생’이라는 대어를 놓친 셈이다.

요즘 지상파 드라마는 철저히 외면 당하고 있다. 특히 스타들을 앞세운 주중 미니시리즈는 고작 시청률 10%가 성패의 기준이 될 정도다. ‘국민 드라마’의 탄생은 언감생심이다. 회당 1억 원에 육박하는 개런티를 받는 스타도 무용지물이다. 스타 파워가 무의미하다는 지적도 있다. 하지만 더 정확히 말하자면 스타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제작진과, 제작진이 100% 기량을 발휘할 기회를 주지 않는 방송사의 잘못이 더 크다.
한 드라마 작가는 한국 드라마 시장을 망치는 주범으로 ‘쪽대본’을 꼽았다. 쪽대본은 정말 A4 용지에 덜렁 대사 몇 줄이 적혀진 경우가 많다. 작가가 급하게 써서 이메일로 보내면 조연출이 열심히 출력해 대기 중이던 제작진과 출연진에게 나눠준다. 이런 식이니 연기와 연출의 앞뒤 연결이 맞을리 없어 배우와 PD는 각각 연기력 논란, 연출력 부족이라는 오명을 쓴다. 쪽대본으로 누덕누덕 기운 드라마가 온전한 옷으로 비쳐지길 바라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쪽대본과는 거리가 먼 작가가 있다. ‘언어의 연금술사’라 불리는 노희경 작가다. ‘그 겨울, 바람이 분다’에 이어 ‘괜찮아, 사랑이야’의 집필을 절반 이상 마친 상태에서 촬영에 돌입했다. 앞 뒤 이야기를 정확히 알고 있는 배우들은 호연을 펼쳤고 김규태 PD의 연출도 매끄러웠다. 재료가 신선하고 온전하니 결과물은 먹음직스러웠다. 하지만 이 바통을 이어받은 SBS 수목드라마 ‘내겐 너무 사랑스러운 그녀’는 쪽대본이 난무한다. 결과와 평가는 재차 말할 필요가 없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상황에 대한 문제의식 부재다. SBS가 ‘비밀의 문’의 후속으로 준비하는 ‘펀치’는 방송을 한 달여 앞둔 상황에서 2개의 대본을 확보했다. 1개의 대본을 내고 캐스팅을 하려고 하니 출연 제안을 받은 대부분 배우들은 “1부만 보고 판단할 수 없다”며 고사했다. 결국 다른 작품의 편성이 거론됐고 그제서야 박경수 작가는 27일 부랴부랴 2부를 전달했다. 그러자 SBS는 다시금 ‘펀치’를 고수했다.

편성은 방송사의 고유 권한이다. 하지만 그들이 사용하는 전파는 공공재다. 방송 사고를 내면 시청자들에게 사죄를 해야 하는 이유다. 그렇기 때문에 방송과 편성은 시청자들과의 약속이고, 방송사는 이를 지킬 수 있도록 항시 대비해야 한다. 하지만 SBS를 비롯해 요즘 지상파 드라마국은 참 급하고, 바투게 움직인다. 드라마의 퀄리티가 하락하는 이유다.
특히 ‘펀치’의 경우 SBS가 기획을 하고 HB엔터테인먼트에 제작을 맡긴 경우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HB엔터테인먼트 역시 제대로 된 작품을 만드는데 시간적 여유가 부족하다. ‘내겐 너무 사랑스러운 그녀’가 프로야구 플레이오프와 아시안게임 등을 이유로 결방하며 시간을 벌었듯 ‘펀치’ 역시 연말 시상식 및 특집 방송을 이유로 시간을 벌 방법을 찾을 순 있을 것이다.하지만 드라마가 연속성이 중요한 장르라는 것을 감안하면 드라마에 대한 시청자들의 몰입도는 떨어질 수밖에 없다.

한 방송 관계자는 “요즘 볼만한 지상파 드라마가 없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다. 스타를 기용하지 않는 케이블과 종편 드라마의 기획력에 밀리는 분위기다. 격차가 줄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지상파의 안일한 대처”라며 “‘내가 책임지겠다’고 큰소리치는 몇몇 PD들의 개인적 역량이 아니라 시스템에 의해 움직일 필요가 있다. 그리고 문제가 생겼을 때 분명한 책임을 지워야 선순환이 이뤄질 수 있다”고 꼬집었다.

안진용 기자 realyong@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