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워인터뷰>“소통·판단력·스피드 ‘아이스하키 戰術’… 경영에도 중요”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정몽원 한라그룹 회장은 지난 15일 러시아 사할린주 유즈노사할린스크 빙상장에서 열린 안양한라와 사할린 라이언스의 아이스하키 경기를 보며 “우리 선수들이 외국 선수들과 겨뤄 이길 수 있는 요소는 속도다. 기업경영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사할린 = 심만수 기자 panfocus@munhwa.com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정몽원 한라그룹 회장은 지난 16일 인터뷰에서 “기술 확보, 고객 다변화와 시장 세계화가 경영의 최대 과제”라고 설명했다. 심만수 기자 panfocus@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한라그룹 계열사 신입사원들로 구성된 응원단과 함께 응원 중인 정몽원 한라그룹 회장.

얼음판 위에서 벌어지는 ‘수컷’들의 싸움이었다. 헬멧과 보호대가 부서질 것 같은 보디체크(body-check)와 스틱 블레이드가 맞부딪치는 날카로운 굉음, 게다가 지름 7.62㎝의 퍽(puck)을 총알처럼 날리는 속도에 압도당하는 사이 남자의 진한 땀내와 격한 숨소리가 투명 펜스 너머 관중석까지 전율케 했다. 지난 15일 러시아의 동쪽 끝 사할린주 유즈노사할린스크시 크리스털 빙상장에서 열린 2014∼2015시즌 아시아 아이스하키리그 안양한라와 사할린 라이언스의 경기였다. 올여름 사할린 라이언스가 창단돼 아시아리그에 참여하면서 처음 열리게 된 안양한라의 원정경기 3연전 가운데 첫 매치.

그 본능의 질주와 격투가 벌어지는 링크를 관중석에서 뚫어져라 노려보는 ‘우직한 곰’이 보였다. 정몽원(59) 한라그룹 회장이다. 안양한라팀의 상징이 곰인데, 가장 곰 같은 모습은 모기업의 수장인 그였다. 그는 시속 150㎞라는 퍽의 속도를 따라가며 선수들의 상태를 체크했다. “저 친구는 국가대표 대들보 같은 놈입니다”, “쟤는 지난해 부진해서 야단을 좀 맞았는데 올해는 몸무게를 확 줄여서 나타났더라고요”, “저 친구는 키가 작아도 정말 속도가 빨라요.” 경기에 나선 22명 선수들의 신상과 컨디션을 속속들이 꿰고 있었다.

점차 1300석을 꽉 채운 사할린 시민들 사이에서 “천하무적! 안양한라!”를 외치는 응원단 ‘빅토리 빅 베어(Victory Big Bear)’ 20여 명의 함성이 열기를 더해 갔지만, 링크의 치열한 공방은 연장 접전 끝에 0대 1, 안양한라의 패배로 막을 내렸다.

그날 저녁 숙소로 돌아온 정 회장은 계열사 신입사원들로 구성된 응원단원들과 만찬을 함께했다. 패장은 “첫 원정서 이 정도면 잘한 것”이라고 했지만 쓴맛을 다셨다. “아이스하키에서 하나 배운 게 있다. 일희일비하지 말아야 한다는 거다.” 뼈 있는 말도 했다. “패배할 수도 있다. 그런데 지고도 웃으며 나오는 것은 용서가 안 된다.” 털털한 쌀집 아저씨 같은 풍모에서 거침없는 농과 타박이 튀어나왔다. 그런데도 진중함을 잃지 않고, 속정을 느끼게 만드는 인물.

그날부터 지난 17일 인천공항에 돌아올 때까지 2박 3일간 “지난 20년간 아이스하키에 미쳐 살았다”는 정 회장에게 물어보고, 지켜보고, 농을 걸 수 있었다. 그는 불편한 내색 한번 없이 질문에 응했고, 격의 없이 농을 받아줬다.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을 준비하는 대한아이스하키협회 회장으로서도, 지난 17년간 한라그룹 재건을 진두지휘해온 기업 총수로서도 그러했다.

―왜 아이스하키인가. 대체 매력이 무엇인가.

“아이스하키는 스피드, 열정, 힘을 모두 느낄 수 있는 스포츠다. 중독성이 아주 강하다. 한번 빙상장에 와본 사람들은 계속 찾는다. 박진감이나 몰입도에서 비교할 만한 종목을 찾기 어렵다. 또 우직하다. 좋은 성적을 내려면 선수들 모두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신의 책임을 완수해야 한다. 한라그룹의 기업문화와도 상당히 비슷한 점이 많다.”

―아이스하키가 인기 스포츠로 성장할 수 있다고 확신하는가.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이 개최되고 나면 인기 스포츠로 도약할 잠재력이 충분하다고 본다. 올림픽 개최가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경기 시설을 확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에게 세계적인 링크가 생기지 않느냐. 축구에서도 2002년 한일 월드컵 개최를 계기로 세계적인 경기장이 여러 개 생겼고, 그 기반이 한국 축구 세계화에 크게 기여했다. 아이스하키도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한다. 아이스하키가 돈이 많이 드는 종목이라는 선입견이 많은데, 실상 따지고 보면 그렇지 않다. 야구나 골프 같은 종목도 장비 가격이 비싸지만 많은 사람이 즐기고 대중화되지 않았느냐.”

정 회장은 한라그룹 계열사인 만도기계 사장으로 재직하던 1994년 아이스하키팀(만도위니아)을 창단했다. 당시 주력제품인 에어컨을 홍보하기 위해 스포츠 마케팅 차원에서 아이스하키팀을 창단하자는 사원들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그 당돌한 제안을 한 사원이 현재 대한아이스하키협회의 살림꾼 양승준 전무다. 하지만 외환위기로 온 나라가 휘청거리던 1998년 한라그룹이 부도를 내고 만도기계가 매각되자 팀 해체설이 나왔다. 역설적이게도 만도위니아는 그해 창단 후 처음으로 우승을 거뒀다.

“세상사 참 알 수 없죠? 그렇게 지원해줄 때도 못해내던 우승을 그 어려운 때 해냈어요. 작은 일이랄 수도 있지만 내게는 큰 용기를 줬어요. 포기할 수 없게 만든 겁니다.”

그게 회생의 기운이 됐는지 정 회장은 2008년 만도를 되찾았고, 지난해 1월에는 대한아이스하키협회 회장에 선출됐다. “회사 홍보에 무슨 도움이 되느냐”는 주변 반대에도 뚝심으로 버티며 뒷바라지해온 ‘큰 형님’이 한국 아이스하키계의 수장이 된 것이다.

그는 취임하자마자 “평창동계올림픽 출전을 목표로 하겠다”고 공언했다. 그리고 1년 8개월간의 스포츠 외교 끝에 지난 9월 21일 국제아이스하키연맹(IIHF)으로부터 한국 남녀 대표팀의 평창동계올림픽 본선 출전권을 받아냈다. 한국 아이스하키 사상 첫 올림픽 무대 진출이다.

―아이스하키 종목엔 개최국의 ‘자동진출권’이 없다던데.

“2011년 7월에 평창동계올림픽 개최가 확정됐지만 이후 IIHF는 한국에 자동출전권을 부여하는 데 미온적이었다. 2006년 토리노대회 이후 올림픽이 전통의 아이스하키 강국인 캐나다(2010년 밴쿠버), 러시아(2014년 소치)에서 열려 개최국 자동출전권은 사실상 폐지된 상태였다. 우리가 평창올림픽에 출전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자동출전권을 부활시키는 것이었는데, IIHF는 한국 대표팀의 실력이 세계 수준과 큰 차이가 난다는 이유를 들며 좀처럼 우리의 평창행을 확정해 주려고 하지 않았다.”

―스포츠 외교가 시작된 건가.

“IIHF를 설득하려면 우리 대표팀의 경기력을 끌어올리고, 한국 아이스하키 발전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지난해 6월 르네 파젤 IIHF 회장을 처음 만나서 한국 대표팀의 평창올림픽 참가의 당위성을 설명했고, 그해 11월에는 스위스 취리히를 방문해 IIHF 수뇌부들과 특별 워크숍도 열었다. 그래서 올해 4월 경기 고양시에서 열린 세계선수권 디비전1 그룹A 대회에서 최하위만 하지 않는다면 평창올림픽 본선 출전권을 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 대회에서 한국 대표팀은 최하위를 기록했다. 정말 쉽지 않더라.”

포기할 순 없었다. 확실한 ‘보증수표’인 감독 영입에 총력을 기울였다. 드디어 지난 7월 한국인으론 처음으로 북미아이스하키리그(NHL) 무대에 섰고, 아시아인 최초로 NHL 정상인 스탠리컵을 두 번이나 들어 올린 백지선(47) 감독을 남녀 대표팀의 사령탑으로 선임했다.

“IIHF가 요구하는 핵심은 한국 대표팀의 경기력을 끌어올릴 수 있는 신뢰도 높은 감독과 예산 지원이었어요. 15개의 액션플랜을 제시했어요. 첫째가 감독이었는데, 그걸 맞춘 겁니다. 예산은 4년에 걸쳐 200억 원을 투자하겠다고 했어요. 70%는 외부에서, 30%는 연맹에서 책임진다는 자금조달 계획도 설명했고요. 그게 IIHF를 움직인 겁니다.”

그의 감독 발탁은 일단 성공작이란 평가를 받고 있다. 백 감독이 이끄는 한국 대표팀은 지난 10일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열린 ‘2014 유로 아이스하키 챌린지’에서 이탈리아, 폴란드 같은 강호를 연파하고 2승 1패로 준우승을 차지했다.

―아이스하키 남자 대표팀의 요즘 성적이 ‘돌풍’ 수준이다.

“백 감독이 대회 참가 전에 ‘우리는 이긴다’고 하더라. 그런데 정말 이기더라. 집에서 아내와 인터넷으로 새벽까지 봤다. ‘우리 아이들이 달라졌어요’였다. 지도자 한 사람이 바뀌어서 달라진 게 너무 많다. 훌륭한 지도자와 좋은 훈련 여건이 제공되면 기대 이상으로 빠르게 발전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 것이다. 선수들에게 자신감이 생긴 것이 가장 반갑다.”

정 회장은 몇 번이나 “한국 대표팀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의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고 했다. 2010년 남자 대표팀의 세계 랭킹은 49개국 중 33위였으나 이후 4년 동안 10계단이 상승해 현재 23위란다. 정 회장은 “일본이 지난 10년간 22위였다가 최근에야 한 계단 올라섰다”면서 “우리 선수들의 기본 자질은 나쁘지 않다. 다만 시스템과 지원이 뒷받침되지 못했을 뿐”이라고 했다. 대표팀의 경기력에서 정부 지원으로 주제를 옮기자 그의 목소리에 한층 더 힘이 들어갔다.

―가장 아쉬운 게 무엇인가.

“아직까지 동계올림픽에서 아이스하키가 차지하는 비중과 중요성이 제대로 인식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이스하키는 하계올림픽에서 마라톤과 축구를 합한 것만큼이나 동계올림픽 흥행에서 절대적인 비중을 가진다. 전체 입장 수입 중 2010년 밴쿠버올림픽 때 46%, 올해 소치올림픽 때 50%를 아이스하키가 책임졌다. 폐막식 전 마지막 하이라이트 경기도 아이스하키 남자부 결승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선 아이스하키에 ‘비인기 종목’이라는 꼬리표가 따라 붙는다. 투자와 지원만 이뤄지면 우리 아이스하키는 날개를 달 수 있다.”

―한일 월드컵에서 한국 축구가 4강 신화를 이룰 때와 같은 국민적인 지원이 필요하단 뜻인가.

“당시 축구 대표팀은 서울 타워호텔에 소집돼 미사리 구장에서 훈련하다 파주 국가대표트레이닝센터가 완공돼 좋은 여건에서 훈련하고, 장기 해외 전지훈련을 통해 4강 신화의 발판을 만들지 않았나. 아이스하키 대표팀도 그런 지원이 있다면 국민들에게 감동을 선사할 수 있다. 현재 아이스하키 대표팀은 훈련할 장소도 마땅치 않다. 링크를 한번 빌려 훈련하려면 눈치를 봐야 하고, 마음 놓고 합숙할 시설이 없어서 호텔을 전전하고 있다. 안정된 훈련 여건이 마련되고 투자가 이뤄진다면 아이스하키도 축구처럼 성장하지 말라는 법이 없다.”

―마지막 소원이 아이스하키 강국을 만드는 것이라고 했던데.

“아이스하키 경기가 열릴 때마다 매표소 앞에 100명 이상 줄 서있는 풍경을 보고 싶다. 백 감독이 자신의 하키 철학을 ‘3P’로 얘기했다. 열정(Passion), 연습(Practice), 인내(Perseverance)다. 그는 거기에 하나 더 보태서 ‘4P’가 됐다고 얘기한다. 마지막 P는 평창(PyeongChang), 내가 그의 꿈을 이룰 수 있게 지원할 것이다.”

그는 사촌 동생인 정몽규 대한축구협회 회장(현대산업개발 회장)이 도움을 주느냐고 묻자 “우리가 도와야지 무슨 소리냐”고 되받았다. “우리 선수들은 축구보다 아이스하키의 세계 랭킹이 훨씬 높다고 자랑한다. 우리는 23위, 축구는 66위인데 어디에다 비교하느냐. 기분 나쁘다”며 크게 웃었다.

그의 본업은 기업인이다. 보호장구도 없이 맨몸으로 퍽을 향해 질주하는 하키선수일지도 모른다. 정 회장은 1997년 1월 한라그룹 회장에 올랐지만 같은 해 12월 그룹 부도로 대부분 계열사를 잃고 한라건설의 경영만 맡게 됐다. 이후 난관을 극복해 경영 정상화를 일궈 냈고, 2008년 초 만도를 다시 인수했다. 연장전 골든골과 같은 ‘대역전극’이었다.

―아이스하키의 승리 조건과 기업 경영의 성공 조건 간에 서로 맞닿는 요소가 있다면.

“첫째는 소통이다. 선수 간, 선수와 감독 간의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한몸이 돼야 한다. 둘째는 경기 흐름을 읽는 통찰력과 적시에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는 판단력이다. 셋째는 스피드로 승부를 걸어야 한다. 기업 경영에서도 소통과 통찰력, 의사결정의 스피드가 매우 중요하다.”

―그룹 경영에서 일관되게 지켜온 원칙은 무엇인가.

“부도가 나고 구조조정해야 하는 때가 정말 어려웠다. 그런데 그림을 그리다 보니 우리가 잘하면 살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사원들에게 한번 해보자고 비전을 줬다. 그리고 그걸 달성하려면 이런저런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설명했다. 각 단계가 끝날 때마다 우리가 해온 것을 알려 주고, 그다음엔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공유하면서 같이 가자고 했다. 그런 소통이 통했던 것 같다. 회사를 살려야 한다는 전 사원들의 간절함이 있었던 게 가장 크지 않았나 싶다. 손자병법에 ‘장수와 병사가 하나가 되면 반드시 이긴다(上下同欲者勝)’고 했다. 어떤 조직이건 위아래가 한마음이 되면 이루지 못할 게 없다고 본다.”

―다시 찾은 만도의 사장으로 취임한 2008년 3월 12일이 다른 면으로도 의미 있는 날이라고 들었다.

“만도를 찾아온 건 기적 같은 일이었다. 하늘이 그런 걸 주셨으니 나도 좋아하는 걸 하나 포기해야겠다 생각했다. 술과 담배 중 하나 아니냐. 두 가지를 비교해 보니 술은 당장 마셔야겠더라. 담배는 백해무익하고. 내가 봐도 놀라울 정도로 하루 세 갑씩 피우던 담배를 그날로 끊었다. 회사를 되찾은 것뿐만 아니라 건강까지 얻었다. 담배는 정말 잘 끊은 것 같다.(웃음)”

―아버지 정인영 전 명예회장(2006년 작고)은 뇌졸중 투병의 와중에도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서 ‘재계의 부도옹(不倒翁)’으로 불렸다. 그 점에서도 아버지와 닮은 것 같다.

“감히 아버지의 수준과 경험에 비교할 순 없다. 한참 모자란다. 아버지는 정말 대단하셨다. 아버지는 정말 쓰러졌던 것을 다시 세우셨고, 나는 한라건설이 어려웠던 것을 회복한 정도다.”

―지금도 아버지 생각이 많이 나는가.

“지금도 중요한 결정을 할 땐 아버지 산소(경기 양평군 양서면 용담리)에 간다. ‘제가 이런 것을 하려고 합니다. 힘과 용기, 지혜를 주세요’라고 말씀드린다. 혼자 결정한다는 게 정말 어렵더라. 물론 주변의 많은 사람들과 상의하지만, 마지막 결정할 때엔 산소에 가서 보고하고, 마음가짐을 다지고 온다.”

그는 ‘아버지가 현답을 주시더냐’고 우문을 던지자 “그렇게 믿고 있다. 기를 받아 오는 것”이라며 크게 웃었다. ‘지금도 그리우냐’는 말엔 “내가 여기까지 온 것은 아버지가 끌어준 것과 어머니의 기도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아버지의 훈육 방식은 어떠셨는가.

“진짜 엄격한 분이셨다. 근면, 검소, 절약은 기본이다. 외박도 못 했다. 친구들은 집에 데리고 와서 자라고 하시면서 아들이 밖에서 자는 것은 못하게 하셨다. 그 대신 여행을 많이 권장하셨다. 여러 가지를 배울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신 것 같다. 그런데 여행계획서를 내야 했다. 어디를 가고 무엇을 보고 어떻게 쓰겠다고 하면 몇 번 퇴짜를 맞을 정도로 꼼꼼히 살펴보신 후에야 돈을 주셨다.”

―아버지의 일상 그 자체가 교육이었을 것 같다.

“아버지의 말씀이 내 의견과 다를 때면 직접 얼굴을 보며 말씀을 드리는 게 너무 무서워서 편지를 썼다. 다섯 통 정도를 보냈는데 내 의견을 존중해 주셨다. 정말 무서웠지만, 가장 존경했던 분이다. 일상의 하나하나가 큰 가르침이었다. 그 부지런함은 우리 집안의 내력인 것 같다. 큰아버님(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도,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도 그러하시다. 정 회장에게 한번 찾아뵙겠다고 했더니 7시에 오라고 하시더라. 처음엔 저녁인 줄 알았는데, 아침 7시였다. 아버지도 새벽 3시쯤 현장으로 떠나곤 하셨다. 그때는 힘들었지만, 자주 보면서 어느덧 그게 내 생활방식이 돼 버렸다. 그 덕분에 내가 크게 벗어나지 않는 생활을 하게 된 것 같다.”

―아버지가 남겨준 유산 가운데 가장 소중한 게 무엇인가.

“내가 지향하는 경영의 핵심 가치 가운데 두 개를 남겨주셨다. 첫째는 정도경영이다. 혼자서 우직하게 밀고 나가면 반드시 좋은 성과를 얻는다는 것이다. 둘째는 프런티어 정신이다. 뇌졸중으로 불편한 상황이었는데도 ‘내가 중국 가서 크게 한번 해봐야지’ 했던 정신이다. 아버지는 자주 ‘학여역수행주 부진즉퇴(學如逆水行舟不進則退)’라고 하셨다. 배움이라는 것은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배와 같아서 어렵지만 그래도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퇴보한다는 뜻이다. 그걸 ‘배움’ 대신에 ‘사업이라는 것은’ ‘연구라는 것은’ 하는 식으로 부서마다 바꿔 가면서 말씀하셨다. 과감하게 도전하고 매사 적극적으로 추진한다는, 우리에게는 가장 뿌리가 되는 말이다.”

―한라홀딩스㈜를 중심으로 한 지주회사 전환 작업이 올해 말쯤 마무리되면 17년간 지속해 온 한라그룹 재건의 꿈을 이루는데.

“아직 끝난 게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경기가 전반적으로 좋지 않은 상황이지 않느냐. 예측불허라는 말로 다 표현되지 않는 변화무쌍한 세상이다. 항상 깨어 있는 시스템을 갖춰야겠다는 생각이다. 우리의 주력이 건설과 자동차부품인데, 거기에 대응하려면 독립경영을 해야겠더라. 지주회사는 전체적인 방향 설정과 사전 리스크 제거에 중점을 두고, 각 계열사는 최고경영자(CEO) 책임하에 경영하면서 전체의 시너지를 높이는 시스템을 만들어갈 생각이다.”

―올해 창립기념식에서 ‘영속하는 기업’으로 키우겠다고 했다.

“그러려면 기술 확보가 가장 관건이다. 기술처럼 정직한 게 없더라. 지름길이 없다. 독일에선 4세 때부터 자동차 밑에 기어 들어가서 부품을 만진다고 한다. 1887년에 자동차 특허를 처음 냈고, 몇 해 전 프랑크푸르트 부품전시회에 가보니 ‘자동차 역사 126년’이라고 써놓고 기를 죽이더라. 그런 친구들과 싸우려면 대충 하려는 마음으로는 안 된다. 최근에 국내 정보기술(IT)기업들이 어려움을 겪는 것도 마케팅만 앞세워서 그런 거다. 하드웨어는 최고의 경지에 올랐으나 소프트웨어가 없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주력사인 만도의 성장동력도 기술 개발에서 온다고 본다. 연구·개발(R&D)에 매출액 대비 5% 이상을 쏟아붓고 있다. 다만 선진업체들이 워낙 강하기 때문에 외부 업체와 제휴해서 원천기술을 확보하는 데도 힘쓸 것이다. 또한 품질이 담보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생산하는 자동차 부품들은 생명과 직결된 것들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세계화(globalization)다. 고객사를 해외로 확장하고 다변화해서 이상적인 포트폴리오를 갖추는 게 중요하다고 본다.”

―아직 한라건설에 대한 걱정들이 남아 있는 것 같다.

“지난 5년간 상당히 어려웠다. 우리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피로가 많이 쌓였다. 올해 턴어라운드(실적 회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해서 연초부터 움직였다. 올해 말을 목표로 삼았다가 부실자산 정리 때문에 조금 지연됐는데, 내년 3월까지는 자구 노력을 끝내고 수익성도 좋아질 것이다. 건설 부문 비중을 70%까지 줄이고, 신규사업도 건설과 연관돼 있는 부문으로 추진 중이다. 양보다는 질의 승부다.”

정 회장은 새로운 분야 진출 계획이 있느냐고 묻자 “기술 확보를 위한 인수·합병(M&A), 기술 제휴 등은 하겠지만 새로운 비즈니스는 생각하지 않고 있다”면서 “우리 제품의 내부 기술 확보에 총력을 기울이는 게 현재의 방침”이라고 했다.

인터뷰 = 오승훈 부장대우(경제산업부)
사할린 = oshun@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