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er Story >프로골퍼 백규정父 “정말 할 일 없으면 연습장 가”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백규정이 1일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 캠퍼스 체육교육관 강의실 앞에서 학교생활과 미국 진출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김동훈 기자 dhk@

올해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투어가 낳은 최고 스타 중 한 명인 백규정(19·CJ오쇼핑). 백규정을 두고 은퇴한 박지은(35)과 닮은 점이 많다고 말한다. 정상급 선수이면서도 알고 보면 게으름을 많이 피운다. 박지은은 연습을 거의 하지 않는다고 했다. 안되는 게 별로 없기 때문이라고 당당히 답했다. 그래서 박지은은 전성기에 ‘골프 천재’로 불렸다. 백규정 역시 이런 박지은을 닮아 ‘게으른 천재’라는 소리를 종종 듣는다. 그 역시 ‘죽어라, 연습하는’ 다른 선수들과는 달리 연습도 대충이다. 둘은 성격도 닮아 직설적이다. 운동선수에겐 다소 불리하다. 내 ‘패’를 숨겨야 하는 ‘포커페이스’가 못되므로 뜻하지 않게 대가도 치른다. 백규정은 대회 때 샷 결과가 안 좋으면 표정에 그대로 나타난다. 그래서 오해도 받는다. 너무 인상을 쓴다는 소리도 듣는다. 경기가 안 풀리면 냉기가 싹 돈다. 이 때문에 선배들에게 투어에서 인사 안 하는 후배로 찍혀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골프스타일도 닮았다. 박지은도 현역시절 여자 선수 중 드물게 공격골프의 대가였기에 한 홀에서 더블보기 이상을 기록하는 ‘빅 스코어’가 많았다. 백규정 역시 돌아가는 법이 없다. 어찌 보면 ‘무데뽀’로, 바로 핀을 공략할 때도 잦다. 그만큼 자신의 샷을 믿는다. 물론 성공도 있었지만 실패도 많았다.

백규정은 올해 KLPGA투어 ‘루키’로 데뷔해 시즌 3승과 함께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 하나·외환챔피언십까지 우승했다. KLPGA투어 신인상을 받았고, 내년 미국 풀시드권도 따내며 골프인생 중 최고의 한 해를 보냈다. 1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 캠퍼스 체육교육관에서 막 수업을 마치고 나온 백규정을 만났다. 늘 골프대회에서 썼던 모자를 벗은 탓인지 노란 염색 머리가 유난히 눈에 띄었다. “이젠 염색 머리도 다음 주면 끝이에요…”라고 말문을 열었다. “어차피 (내년에) 미국 가면 머리 봐줄 (미용실) 언니가 없으니 곧 검은색 머리로 염색해야 할 것 같다”며 밝게 웃었다. 여자에겐 마이너스가 될 억센 경상도 사투리를 쓰니 말도 직설적으로 들린다. 그러나 웃음기는 예전보다 많아졌다.

그는 “요즘 학교생활이 즐거워요. (대회가 없어) 쉬는 날에 골프에 대해 스트레스받는 것보다 친구들 만나고 수업 듣고, 저녁 먹고 수다도 떨고… 이렇게 스트레스 푸는 게 좋아요”라고 했다. 그는 이날 학교에 간 지 1주일째라면서 이번 주 일본에서 열리는 한일여자프로골프대항전을 마치고 다음 주 다시 등교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학교 나오는 게 대회장에서 보내는 것보다 더 좋은 것 같다고 말했다. 육동원 체육교육과 교수는 “(백)규정이는 여느 체육 특기생보다 학교에 자주 와 교수들도 잘 아는 편”이라고 말했다. 백규정은 “교수님들이 저를 잘 기억해 주시는 것 같다”면서 “이 덕에 영어 과목에서 A학점을 받았다”고 자랑했다.

백규정은 2주 전 LPGA투어 시즌 최종전인 CME그룹 투어챔피언십에 출전했다. 미국에서 열리는 대회는 첫 출전이었다. 이 대회에 참가하고 돌아온 그는 생각을 많이 바꿨다고 했다. 내년 시즌 미국 진출을 위해 준비할 게 태산처럼 많이 생겼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첫 대회를 치른 소감을 물었다. “미국에서 대회 출전은 처음이었죠. 첫날과 둘째 날까지 그린에서 라인을 제대로 읽지 못해 엄청나게 고생했죠. 버뮤다 잔디인데 잎이 넓어 공이 미끄러져 가는 것 같더라고요. (박)인비 언니나 (허)미정 언니도 처음에 와서 똑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하더라고요. 사흘째부터는 그린을 조금씩 알겠더군요. 아무튼 그동안 안 보이던 단점과 부족했던 점들만 많이 보였죠. 아직 내가 멀었다는 생각만 절감하고 왔죠.”

그는 느긋하게 2월쯤 호주에서 데뷔전을 치를 계획이었지만, 1월 개막전부터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미국 대회를 가보니 앞으로 내가 해야 할 미국 투어에 대해 전반적으로 준비할 것들이 정리된 것 같아요. 그래서 호주에서 전지훈련 후 호주여자오픈 때부터 출전하려 했던 것을 내년 1월 28일 미국에서 열리는 코츠 챔피언십부터 출전키로 했죠. 또 이왕 올 거면 빨리 와서 자리 잡으라는 게 미국서 만난 선배들의 조언이었죠.”

백규정이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이 궁금했다. “경기만 열심히 하자고 했더니 결과가 좋게 나왔을 뿐”이라는 의례적이고 싱거운 답만 돌아왔다. 사실 기자는 백규정의 아버지 백진우(51) 씨를 가을 시즌 이후 대회장에서 몇 차례 만나 짬짬이 얘기한 적이 있다.

‘골프대디’ 백 씨의 판단은 달랐다. 백 씨는 박세리를 키운 ‘영원한 스승’ 박준철 씨와 골프대디로서 너무도 닮았다. 백 씨 역시 딸이 골프채를 잡기 전 알아주는 싱글핸디캐퍼였다. 경북 구미 토박이인 백 씨는 여러 개의 주유소 등을 경영해 왔다. 한창때 언더파까지 쳤다. 7세짜리 딸이 골프를 시작하자 자신은 아예 골프를 끊었다. 애한테 신경을 쓰다 보니 골프에 재미가 없어졌다. 백규정이 고2 때까지 10년 동안 전문 코치 없이 아버지 백 씨가 가르쳤다.

초등학생 시절 미국으로 교습을 가 데이비드 레드베터 아카데미에서 며칠간 배운 적 있다. 딸이 골프를 배우는 동안 백 씨도 옆에서 귀동냥으로 들었고, 딸을 교육했다. 그 때문에 늘 함께해온 백규정의 골프스타일은 아버지와 너무 닮았다. 부녀는 급한 성격도 닮았다. 백규정은 연습 스윙 없이 곧바로 치는 편이다. 백 씨는 딸에게 “너무 오래 생각하지 마라. 맞다고 판단하면 바로 가라. 생각이 깊어지면 이 생각 저 생각만 하고 갈 곳이 없다”고 가르쳤다. 그래서 백규정은 어렸을 때부터 두려움이 없고 공격적으로 변했다. 남들보다 공격적인 골프, 바른 골프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백규정은 프로대회를 중학교 1학년 때부터 나갔고, 아버지가 고2 때까지 15차례 정도 대회 캐디를 한 적 있다. 대회 때 캐디로 나선 아빠가 불러준 거리대로 쳤다가 짧거나 길면 딸은 곧바로 눈을 흘기며 “거봐 내 말이 맞잖아”했다. 부녀간 언쟁(?)도 일어나곤 한다. 백 씨는 프로급 수준이 된 딸을 가르치기엔 ‘밑천’이 드러나자 딸이 고2 때부터 호주 출신 코치 이언 트릭스(62)에게 배우도록 했다. 지금까지 아버지 외에 유일한 스윙 코치였다. 이언 코치는 백규정에게 행운을 안겨준 스승이었다. 지난 4월 넥센마스터스 때 한국에 온 이언 코치는 백규정의 스윙을 잠시 점검해 줬고, 정규투어 첫 우승컵을 안겨 줬다. 또 10월 하나·외환챔피언십 때도 이언 코치가 한국에 와 짬을 내 사사를 했는데 백규정이 우승했다. 아버지 백 씨는 “외국인 코치는 선수의 아주 잘못된 부분 한두 가지만 고치도록 요점만 수정해 주는 편이지만, 국내 스윙 코치들은 자신의 취향대로 처음부터 큰 것부터 고치려 하는 차이가 분명한 것 같다”고 말했다.

멘털도 강한 편이다. 백규정은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멘털 코치의 도움을 받아왔다. 여느 선수처럼 따로 메모하며 외우거나 보는 편은 아니지만, 이제는 전 홀에서 한 실수쯤은 곧바로 잊을 만큼 강한 멘털이 습관처럼 배어 있다.

그는 미국에 가도 대학 생활을 충실히 하려고 한다. 인터넷으로 강의를 듣고, 리포트도 제출하고, 한국에 왔을 때 학교에 가급적 출석할 계획이다. 올해 대회기간 중에 월요일과 화요일에 학교에 많이 나왔다. 심지어 프로암 대회가 없어 공식 연습 라운드 때인 목요일에 학교로 간 적도 많다. 1학년 때 3∼5월에는 학교 가는 재미로 연습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한국 대회는 최소 4개 이상은 소화할 예정이다. 처음엔 미국 대회 수를 줄이려 했지만, 이왕이면 미국에서 승부를 볼 작정이다.

백규정은 그동안 부모한테 누누이 들었던 세 가지를 좌우명으로 삼고 싶다고 했다. 첫째 거짓말이나 자기 자신을 속이지 않기, 둘째 남한테 베풀 줄 알고, 셋째 항상 감사하면서 살아가기다.

일단 미국에서는 ‘베이스캠프’격인 거주지로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인근 토런스 쪽에 집을 구하고 투어를 함께할 매니저도 물색 중이다. 시즌 초엔 부모님과 함께 투어를 다닐 계획이다. 그러나 그의 부모는 “5월까지만 함께 다닐 테니 모든 것을 스스로 하는 법을 배우라”고 딸이 일찌감치 미국에서 홀로서기를 할 것을 채근해 놓은 상태다. 백규정이 해야 할 것 중 가장 먼저 꼽는 것은 영어 공부와 체력 보강이다. 일단 경기를 하는 데 지장이 없을 만큼 영어를 구사해야 하는데 걱정이 앞선다고 했고, 한국에서보다 이동 거리가 멀어 체력 보강도 급선무로 생각하고 있다. 또 한 가지는 한 달 전 운전면허시험을 한 번에 통과했지만 아직 부모님이 차를 모는 것을 허락하지 않아 미국에서 꼭 직접 운전해 보는 것도 당장 하고 싶은 일 중 하나라고 전했다.

평소 백규정은 잠꾸러기다. 평소에는 오전 9∼10까지 잔다. 아버지는 “낙천적인 성격 탓에 정말 할 것 없으면 연습장에 가는 아이”라고 말할 정도다. 대신 몰입을 한다. 한 시간을 하든 두 시간을 하든 짧은 시간에 몰입해서 연습을 하는 편이며 연습시간은 길어야 2∼3시간 안팎이라고 한다. 그는 얼마 전 소주 한 병 반을 마신 적 있는데 취하지는 않았다고 했다. 지금까지 휴대전화로 ‘카톡’이나 문자를 주고받는 것도 질색한다. 귀찮기도 하지만 필요한 말 있으면 전화를 하거나 만나서 얘기하는 편이다.

취미라야 집중력을 높인다 해서 한때 ‘피규어’를 만드는 데 몰입하다 그나마 요즘엔 바빠서 미처 조립하지 못한 피규어가 여러 개 있을 정도라고 했다. 그는 자신의 꿈에 대해 “아직 딱 부러지게 정해놓은 것은 없다”면서도 “선수 생활하는 동안 1년씩 최선을 다하다 보면 엄청난 결과가 올 것”이라고 말했다.

최명식 기자 mschoi@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