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도 책임지려 하지 않는 사회… 答 아닌 說만 판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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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모론의 시대 / 전상진 지음 / 문학과 지성사

“가수 A 군과 탤런트 B 양의 열애설이 지금 터진 것은 정부가 이 사건을 덮으려고 정보를 언론사에 뿌렸기 때문이다.” “이번 선거는 무효다. C 후보에게 표를 몰아준 투표함 몇 개가 중간에 끼어들었다는 소문이 있다.” “D기업이 잘 나가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현 정권과 연결된 배후세력이 있다고 한다.”

우리는 음모론의 시대에 산다. 사건이 터지면, 어김없이 뒷얘기가 등장한다. 정부를 뒤흔들 만한 사건부터 연예인들의 사생활까지 대상은 전방위적이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이용 인구가 늘면서 진실 규명의 속도는 음모론의 확산 속도를 전혀 따라가지 못한다. 도대체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가. 해명되지 않은 음모들이 쌓이고, 그만큼 사회의 신뢰가 깎여간다. 사회의 신뢰가 깎인 만큼, 음모론은 더 기승을 부린다. 악순환이다.

전상진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의 신간 ‘음모론의 시대’(문학과지성사)는 대한민국의 일상이 된 음모론을 정조준한다. 대중의 뜨거운 관심에 비해 국내 사회학계에서는 그동안 음모론에 대한 연구를 등한시해왔다. 음모론자를 그저 정신병자, 편집증자로 보는 관점이 주류사회의 견해다. ‘음모론’이란 단어 자체가 주는 부정적인 뉘앙스 때문에 음모론을 허무맹랑한 주장으로 치부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강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최근 2013년 국가기관의 광범위한 대선 개입, 2011년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가해진 디도스(DDos·분산서비스거부) 공격 등 터무니없어 보이는 음모론이 실제 음모로 밝혀졌다. 합리적 의혹 제기와 음모론의 구분은 이제 쉽지 않다. 책은 애초에 음모론 중에서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가를 가리는 ‘재판관’ 역할을 하려고 쓰인 것은 아니다. 저자는 객관적인 관찰자의 시선으로 음모론이 들끓는 이유와 음모론의 정의, 활용방식 등을 분석한다.

“격변은 혼란을 낳고, 혼란은 음모론을 키운다.” 음모론이 횡행하는 이유에 대한 전 교수의 첫마디다. 사회는 점차 복잡하고, 불확실해지고 있다. 이 과정에서 설명할 수 없는 고통과 역경, 불행들이 우리를 찾아 온다. 아무런 이유 없이 당하는 고통은 공포이자 혼돈이다. 우리는 “인지적으로 이해할 수 없고, 감정적으로 받아 들일 수도 없으며, 도덕적으로도 용납되지 않는 일들”의 원인을 찾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과거 사람들은 종교에서 답을 찾으려 했고, 충분한 답을 얻었다 . 저자는 막스 베버의 ‘신정론’(神正論)을 빌려 이를 설명한다. 당시에는 신의 뜻인 현세의 고통을 통해 내세의 평화와 구원을 보장 받을 수 있다고 여겼다. 근대에 들어서는 종교가 현실의 고통에 대한 답을 주지 못하자 그 대상이 정치 이데올로기로 바뀌었다. 하지만 정치 또한 우리의 고통을 설명하거나 치유해줄 수 없다는 생각이 싹트면서 음모론이 ‘세속적 신정론’으로 떠올랐다. 이제 음모론은 종교나 정치 이데올로기를 대신해 죄인을 쫓고 책임자를 색출해 고통을 설명하는 과업을 맡게 됐다. 무책임한 누군가의 잘못이거나 악의에 찬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만든 것으로 인해 ‘내’가 고통을 받고 있고, 그 ‘누군가’를 찾아내야 하는 것이다. 특히 이런 음모론은 ‘비난문화’와 맞물려 증폭된다. 비난문화는 나쁘거나 잘못된 것으로 간주되는 바를 어떤 사람이나 단위에 떠미는 행동이다. 사고가 발생하면 어김없이 마땅히 비난 받아야 할 ‘누군가’가 색출된다.

주로 고통받는 자들은 약자이기 때문에 음모론은 ‘약자의 무기’가 된다. 하지만 기득권은 음모론을 전략적으로 이용해 ‘억압의 망치’로 쓰기도 한다. 음모론은 지지자를 동원하거나 정적을 비난하고, 비판의 정당성을 훼손하는 최고의 수단이다. 음모론자 낙인찍기 전략은 특히 기득권이 자주 쓰는 대응책이다. 음모를 제기하는 쪽을 ‘음모론자’로 몰아 입증 책임을 떠넘기는 것이다. 합리적 비판도 음모론으로 치부하면 그만이다. 음모론에 대한 진실은 항상 ‘저 너머’에 있기 때문에 ‘설’만 확산될 뿐이다.

저자가 우려하는 것은 이 지점에서 발생하는 ‘민주주의의 파괴’와 ‘책임의 위기’다. 음모론의 세상에서는 오직 두 진영만 존재하게 된다. 서로 간의 신뢰가 무너져 대화와 타협, 협력이 불가능해지고 책임을 져야 할 이는 사라진다. 저자는 음모론이 답변이 아닌 질문이 돼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책에서 “음모론이 질문으로 남을 때 비판의 교두보가 될 수 있다”면서 “답변이고자 과욕을 부리면 그것은 더 이상 비판이 아니게 된다”했다. 비판이 아닌 음모론은 망상, 도그마, 기회주의자의 알리바이로 전락한다. 음모론이 제시한 의문에 대한 답은 공적 영역에서의 탐사와 조사다. 음모론이 음모론으로만 남고, 깔아뭉개질 때 사회의 신뢰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

유민환 기자 yoogiza@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