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정영록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가 지난 15일 서울 중구 새문안로 문화일보 사옥 자료실에서 중국 경제 관련 책을 훑어보며 30여 년 동안 중국 경제학을 연구한 인생 역정을 이야기하고 있다. 김호웅 기자 diverkim@
올해 한국과 중국의 통상외교는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일들이 많았다. 지난 11월 한·중 자유무역협정(FTA)이 타결됐고, 최근에는 원·위안화 직거래시장 개설 등에 힘입어 중국과의 경제협력 관계가 그 어느 때보다 돈독해졌기 때문이다.
1992년 8월 중국과 수교한 이후 우리나라에 중국 전문가는 많이 늘었다. 하지만 중국의 주류 경제학을 꿰뚫고 실물과 이론을 겸비한 중국 전문가는 드물다.
민간인 최초로 중국 대사관에서 2년간 경제공사를 맡았던 정영록(56)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가 최근 바빠진 이유다. 정 교수는 1985년 미국에서 중국 경제학을 공부하기 전부터 중국에 관심을 가졌으니 어림잡아 30년이 넘도록 한 분야에 파고든 셈이다.
지난 11일 한파가 몰아친 저녁 서울 동작구 사당역 근처 한식당에서 먼저 도착해 자리를 잡고 있는 정 교수를 만났다. 두 번의 만남이 앞서 있었는데 그는 항상 약속 시간에 앞서 도착해 있었다. 정 교수는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용무가 있을 경우 전화통화보다는 휴대전화 문자로 용건을 주고받을 정도로 형식에 구애받지 않았다. 철저한 실용주의자인 셈이다.
이날은 그가 서울대 국제대학원에서 ‘한·중·일 아시아경제발전 리더십’을 주제로 이번 학기 강의를 마친 날이었다.
이날 정 교수는 대학 졸업 후 30여 간 중국 전문가 된 인생 이야기를 2시간 넘는 시간 동안 막힘없이 풀어냈다. 그는 학창시절부터 지금까지 역사학에 대한 관심이 높다고 말했다.
“미국 흑인작가 앨릭스 헤일리의 소설 ‘뿌리’를 읽고 우리나라 조상에 대한 근원을 찾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동의설’ 등을 통해 우리나라의 뿌리는 대륙에서 내려왔다고 믿었거든요. 또 우리나라 여말 선초 변혁기에 중국의 힘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때부터 어렴풋이 중국에 관심이 생겼다고 볼 수 있지요.”
정 교수가 중국 전문가가 되겠다고 생각을 굳힌 사건이 발생했다. 졸업 후 해군 보급 장교로 함선에서 근무할 때인 1983년 중국 민항기가 영공을 침범해 강원 춘천에 착륙했고, 몇 개월 후에 잠수정이 침범했다.
“그 당시 우리나라는 중국과 수교 이전이라 중국 전문가가 없어 정부가 일 처리에 능숙하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때 ‘나는 중국 관련 전문가가 되리라’고 결심했던 것 같습니다.”
그의 어린 시절은 괴롭고, 힘들었으며 좌절도 많았다. 그가 10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정신적 충격에 경제 형편까지 어려움을 크게 겪었던 것이다.
“중학교 때 부모 없는 아이라는 ‘후레자식’이라는 쌍욕을 한 선생님을 정말 경멸할 정도로 미워했지요. 뒤늦게 그 당시 선생님은 공부하는 방법을 가르친 것이지 제대로 된 학문을 가르치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위안 삼았습니다. 중학교 시절에는 축구부에 들어가 몸을 혹사할 정도로 정신적 혼돈기를 보내기도 했고요. 서울대 입시에서도 재수했고, 학점이 나빴던 탓에 대학원 시험도 떨어졌어요. 어린 시절 좌절을 많이 겪었던 탓에 큰 어려움이 닥쳐도 쉽게 넘어갈 수 있는 뚝심이 그때 생겼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그는 대학 졸업 후 인생의 전환기를 맞이할 수 있는 행운을 잡았다. 해군 장교를 마치고 입사한 외국계 체이스맨해튼 은행에 들어가 1년여 동안 근무하면서 미국 유학을 준비했다. 1984년 미국 남가주대(USC)에서 전 세계 유학생을 대상으로 문·이과 각 1명을 장학생으로 뽑았는데 여기에 정 교수가 선발된 것이다.
“석·박사 과정 모두 장학금을 지원하는 것으로 나에게는 엄청난 혜택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유학생 선발 지원서에 남들과 다른 형식을 취했던 것이 선발자에게 통한 것 같아요.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난 대학교 학점도 나빴고, 모범 답안 같은 훌륭한 스펙도 없었으니까요. 단 중국 경제학을 배워야겠다는 목적 하나는 분명히 밝혔던 것 같습니다. 아시아계 한국 학생이 중국 경제학을 미국에서 공부해 한국경제 발전에 역할을 하겠다는 것이 연구계획안의 요지였지요. 지금 생각해 보면 선발자들에게는 낯선 행태의 지원서였던 셈입니다. 그 당시 경제학을 공부하는 사람은 누구의 경제이론에 대해 연구 방법을 정하고 어떻게 공부하겠다는 내용이 주를 이뤘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나는 미국에서 어떻게 공부하겠다는 형식을 무시하고 목적만을 강하게 주장한 것입니다.”
정 교수의 또 다른 행운은 중국 경제 엘리트 1세대와 동문수학했다는 점이다. 정 교수가 미국으로 건너간 1985년은 중국이 문과생들에게 유학을 허용한 첫해다. 베이징(北京)대, 칭화(淸華)대 등 중국 유명 대학의 학생들이 경제학 등 인문학을 배우기 위해 미국에 대거 진출한 것이었다. 중국은 그동안 사상오염에 대한 우려로 이과생만 유학을 허용했던 시절이었다.
“그 당시 인문학을 배우기 위해 중국에서 200여 명의 유학생이 미국으로 들어왔는데, 학생들은 매우 우수할 뿐만 아니라 집안도 대부분 좋았습니다.”
그는 미국에서 중국의 주류 엘리트와 동문수학하면서 끈끈한 네트워크를 형성할 기회를 가졌다. 그 당시 인연을 쌓았던 중국 문과 유학 1세대와의 인연은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그 같은 인연을 바탕으로 정 교수는 전 세계 화교학회의 동북아 지역 이사를 맡고 있다.
정 교수가 유학을 마친 시기는 중국 전문가가 필요한 절묘한 시기였다. 1990년에 들어서 노태우 정권은 북방정책을 표방했다. 러시아와 중국과의 수교를 통해 경제교류를 넓히자는 중장기 전략이 마련돼 본격적으로 가동된 시점이었다. 때마침 정 교수는 미국에서 5년간의 유학생활을 끝내고 중국 경제학 박사가 돼 한국으로 돌아왔다. 정부는 국책 연구소인 한국개발연구원(KDI)에서 분리해 만든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을 만들었다. 정 교수는 KIEP와 모 대기업의 중국 관련 신사업 프로젝트 담당자로 ‘콜’을 받았다.
“당시 대기업의 스카우트 조건은 유혹을 뿌리칠 수 없는 파격적인 조건이었습니다. 만약 그때 대기업에 갔다면 돈은 많이 벌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5년간의 유학생활을 통해 중국의 저력과 잠재력을 확인한 때라서 공명심이 더 컸어요. 중국의 잠재력에 무서움까지 느낀 바 있던 시점에서 우리나라가 중국의 속국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탄탄한 조국의 경제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더 강했던 것이죠.”
그는 KIEP에서 심부름 등 밑바닥부터 일을 배우면서 정부의 대중 정책연구를 했다. 우리나라는 2년 뒤 1992년 8월 24일 중국과 수교를 했고 한·중 수교의 부분적인 작업을 정 교수가 진행했다.
중국 본토의 경험은 그를 중국 전문가로 거듭날 수 있게 했다. 1993년 김영삼 정권으로 교체되면서 외국어대 총장을 지낸 황병태 씨가 중국대사로 선임됐다. 중국과의 수교 후 한·중 외교는 경제통상이 주축이 됐다. 그렇지만 미국과의 관계를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황 대사는 정부보다는 민간 전문가의 도움이 절실한 것으로 판단했다. 대사관 최초로 중국 대사관 파견 연구관을 뽑았다. 조건은 미국에서 유학한 중국 경제학 박사를 찾았고, 정 교수가 선발됐다. 그는 1993년 5월부터 1995년 8월까지 2년이 넘는 첫 번째 중국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중국 현지에 진출한 국내 기업에 중국에서 꼭 필요한 제도와 소식들을 엮어 매월 보냈다. 중국 정부 소속 부국장급 이상을 초청해 대사관에서 강연회를 개최하는 등 기업 관련자와의 자리도 자주 만들었다. 중국 고위 공무원과 우리나라 기업인의 네트워크를 만들기 위해 만남의 장을 열었다.
정 교수는 중국 전문가를 양성하는 중국 현지 연구소와 현대중국학회를 만든 일을 ‘내 평생 잘한 일’로 꼽았다. 먼저 1995년 5월 KIEP 중국 현지 지소를 만든 일이다.
“그 당시 중국 본토에 이공계 연구소를 제외하고는 문과 연구소는 한국이 최초로 만들었습니다. 저력을 가진 중국이 짧은 시간 안에 강대국이 되었을 경우 한국에는 더 많은 전문가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었지요. 나의 이런 생각을 알고 있던 황 대사가 정부에 강력히 주장했는데 받아들여진 것입니다.”
당시 재정기획부 현정택(전 여성부 차관) 과장이 중국 힘의 저력을 간파하고 동의한 점 역시 일이 쉽게 풀릴 수 있었던 배경이었다. 그는 지소가 만들어진 후 3개월 뒤인 8월에 한국으로 귀국했다. 중국 지소에는 소장을 비롯해 연구원 2명까지 총 3명의 우리나라 사람과 현지 채용 인원 3∼4명이 상주했다. 소장과 연구원들이 2∼3년 이상 중국에서 체류하도록 해 중국 경제에 대해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한국인이 중국 전문가로 성장할 수 있도록 현장에서 실무와 이론을 겸비할 수 있도록 제도화한 것이다. 내년이면 중국 지소 개원 20주년이 된다. 적어도 20여 명 이상이 중국 현지에서 전문가로 양성된 것이다.
정 교수는 2000년에 ㈔현대중국학회를 만들고 초대회장을 맡았다. 40대 초반에 학회 회장을 맡아 중국 전문가 양성과 저변 확대에 전력을 쏟은 것이다. 학회는 출발 당시 42명에서 지금은 200명으로 늘어났다.
박민철 기자 mindom@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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