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초만 기억하는 남자’… 그의 헌신 헛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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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가 없는 남자, HM의 기억 / 수잰 코킨 지음, 이민아 옮김 / 알마

1953년 8월, 27세의 조용하고 온화한 청년 HM은 평범한 삶을 기다리며 수술실로 들어갔다. 어린 시절부터 그를 괴롭히다 이제는 일상생활까지 불가능하게 만든 간질 발작 치료를 위한 뇌 조직 제거 수술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끔찍한 일이지만 당시엔 간질 환자의 뇌 절제 수술이 폭넓게 이뤄졌었다.

이 수술로 그의 뇌에서 좌우 반구를 연결하는 부위의 해마 대부분이 제거됐다. 회복은 빨랐고 발작도 사라졌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하지만 누구도 예상 못 한 부작용이 드러나면서 그의 인생은 돌이킬 수 없는 길로 들어서 버렸다.

지능, 감각, 운동 같은 뇌의 다른 기능은 모두 정상이었지만 HM은 매일 만나는 돌보미를 알아보지 못했고, 그들과 나눈 대화나 병원의 일과도 기억하지 못했다. 기억을 30초 이상 유지하지 못하는 ‘기억상실증’이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의 비극은 인류에겐 행운이었다. ‘영원한 현재’만 살았던 그는 2008년, 82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책의 저자인 수잰 코킨 매사추세츠공대 행동 신경과학연구소 소장을 비롯해 과학자 100여 명이 진행한 수백 건의 연구에 피실험자로 참가했다.

이 연구로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기억과 학습에 관한 사실의 상당부분이 밝혀졌다. HM은 뇌과학 역사상 가장 유명하고 중요한 환자가 됐다. 사생활 보호를 위해 HM으로 알려진 그의 실명은 2008년 사망한 뒤 그의 연구자이자 보호자였던 코킨 박사에 의해 세상에 공개된다. 그의 이름은 헨리 구스타브 몰레이슨이었다.

1962년 만나 헨리가 사망하기까지 46년간 특별한 관계를 맺어온 코킨 교수가 쓴 책은 헨리의 삶을 기술하며 그의 참혹한 운명이 어떻게 뇌과학 연구 발전과 맞물렸는지, 또 그에 대한 연구를 통해 뇌과학이 어떻게 발전했는지를 객관적이면서도 감동적으로 들려준다.

연구자들은 헨리를 통해 측두엽의 한 부위가 단기 기억을 장기 기억으로 전환하는 데 절대적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알아낸다. 또 기억은 몇 단계의 개별 처리 과정으로 나뉘며, 각각의 처리 과정에 기반이 되는 뇌 회로가 따로 있다는 사실도 밝혀진다. 기억하지 못해도 학습하고 습관을 형성할 수 있다는 사실도 그에 대한 추적 연구로 증명된다. 저자는 헨리와 뇌과학 연구결과를 설명하며 자연스럽게 뇌과학 역사 전체에 대한 해설을 풀어낸다.

따라서 책은 뇌과학 역사이자, 한 과학자의 성실한 연구 기록인 동시에 한 사람에 대한 감동적인 전기이자 헌사이다. 헨리는 수술 전 일들에 대한 기억도 상당 부분 손상됐고, 수술 후 일에 대해서는 장기 기억은 전혀 갖지 못했다. 많은 사람을 만났지만 그들에 대한 기억을 가질 수 없었기에 깊은 관계를 만들지 못했다. 과거가 없었을 뿐 아니라 미래 계획이 기억과 기존의 지식을 연결해야 이뤄질 수 있기에 미래도 가질 수 없었다. 그는 오직 수십 초간의 현재만 살았다. 그렇지만 그는 언제나 열린 마음과 신뢰로 사람들을 대했고, 자신에 대한 연구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길 바라며 매번 적극적으로 연구에 참여했다고 한다. 사라진 기억 때문에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살아가면서도 현재에 최선을 다한 그의 삶은 애처로우면서도 인간 존재의 위대함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한다. 46년간 헨리와 깊은 인간적 애정을 쌓았지만 언제나 자신을 처음 보는 낯선 이로 대하는 그를 보며 복잡한 심경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저자의 성찰은 삶에 대한 여러 가지 생각거리를 우리에게 남긴다. 저자는 이런 말도 했다.

“헨리에게는 보통 사람들이 붙잡고 살아가는 정신적인 닻, 그러니까 때로는 부담이 될 수 있는 애착이나 집착이 없었다. 장기 기억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 절대적으로 중요한 요소이지만 때로는 방해 요소가 되기도 한다. 살면서 겪었던 부끄러운 순간,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고통, 처참한 실패와 정신적 충격이나 골치 아픈 문제에서 헤어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장기 기억이 없이 산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두렵지만, 삶이 지금 이 순간의 30초 경계선에서 완성되는 단순한 세계를 살아간다면 얼마나 자유로울까라는 생각을 떨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최현미 기자 chm@munhwa.com